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⑨

제대로 된 각박함을 위해

/ 최지안

 

 

 

 

 

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의 시작이었다. 김형진씨가 나의 글을 불편해 하는 이유를 글로 쓰면서부터 진짜 대화가 시작된 셈이다. 우선 이 부분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제대로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다.

 


# 무시

‘계급의식이라는 것은 싫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느 정도 필요하다.’* 순진하지 못한 나는 계급의식 혹은 계급이라는 것이 없앨 수 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급이라는 단어 에 동의할 마음은 없다. 계급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적용될 때 자주‘무시’라는 감정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그 과정이든 결과물이든 제대로 한 것, 혹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갈린다. 물론‘제대로’, 혹은‘제대로 하지 못한’이라는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층이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 내가 한 사람으로서 - 제대로 되지 못한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마주쳤을 때 그들을 무시해도 될까? 나의 대답은‘아니오’다.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고 날카로운, 때로는 가슴 아픈 비평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무시는 제대로 된 비평과 수정을 방해한다. 올바른 비평을 위해선 존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중이란‘이렇게 제대로 하지 못한 디자인을 했어도 괜찮아’가 아니다. 비평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기꺼이 쏟아주고자 하는 자세를 말한다. 무시는 이미 그 대상을‘마주할 가치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제대로 된 날카로움과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게 한다.

우리나라 디자인계 전반적으로 더 많은‘제대로 된 것’으로 채우고 싶다면, 무시하지 말고 말을 걸어야 한다. 대화를 시도하고 생각을 나눠야 한다.‘저기 자리한 사람이니 보나마나 그러려니’라고 생각하기 전에, 자리도 사람도 다 지우고 제대로 된 디자인을 향한 의지 하나만 세워야 한다.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선‘무시’만큼 빠르게 제거되어야 할 감정은 없다. 그리고 이 쓰잘 데 없는‘무시’라는 감정은 디자인을 평가하는 데만 끼어들지 않고 디자인 자체를 대하는 태도에도 종종 비집고 들어온다. 예전에 어떤 회사의 책임 디자이너와 나눴던 대화의 일부를 들려 주겠다.


“카탈로그 디자인인가요?”,“네. 그렇기는 한데 하지 말까 생각 중입니다.”

“왜요?”,“그래 봤자 카탈로그잖아요.”


‘그래 봤자 카탈로그’라… 이것은 무슨 표현일까?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황급히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몇 시간 후 나는 그 자리에서 왜 그래 봤자 카탈로그라는 표현을 썼는지 묻고 그 표현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노라 말하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내 스스로가 관계 유지를 위해 비겁하게 피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화의 앞 뒤를 자른 상황이라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대화의 요지를 덧붙이겠다. 카탈로그는 디자이너와 그가 한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기에는 소소한 매체라는 뜻이었다. 뭔가 더 대단한 것, 뭔가 더 의미 있어 보이는 것, 남들 다 하는 카탈로그 말고 다른 것이 낫다는 의미였다.

맙소사. 디자인에서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누가 들어도 알 만한 곳에서 한 일이라야 할까? 어딘가에 크게 기사라도 실릴만한 일을 해야만 의미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디자인을 하면 자존감마저 갖지 못하는 것일까? 카탈로그라서 무시하는 태도는 어쩌면 스스로 제대로 된 자존감을 지니지 못한 자신을 투영하는 또 다른 거울은 아닌가? 카탈로그를 무시하는 그는 카탈로그를 만드는 디자이너와 그의 작업을, 나아가 그 어떤 디자인이든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을까? 평가를 할 수 있는지 여부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그 스스로가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나 있을까?


# 생활과 디자인

김형진씨는 디자인계에서 어떤 업무, 어떤 지역 등에 매겨지게 된 시선의 이유를 인지하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필자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만든 얼룩에 가해지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러우리만치 철저하게 고민하고 반성하며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해 이루어 가는 디자인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카탈로그를 우습게 여기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디자인은 디자이너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다양하고 넓은 의무 중 많은 부분을 버리고‘일부’에 갇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필자가‘디자인은 생활이기도 하다’고 적은 이유이다. 디자인은 무서운 영역이다. 생활의 아주 많은 곳에 연결될 수 있는, 그래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각 디자인은 말 그대로 시각과 관련된 모든 것과 연결된 셈이라서 그 은근한 영향력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디자인이 수행하는 역할은 다양하다. 내 방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고리에서부터 아주 혁신적인 문화운동까지 포함하는 드넓은 세계다. 그렇기에 매일의 삶에 당연한 듯 자리한 것이라 해도 우습게 알아선 안 되는 사람이 디자이너이고, 넓고도 깊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의무를 갖게 되는 사람 또한 디자이너다. 혁신은 큰 것에서만 오지 않는다. 작은 것에서도 혁신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시야는 치열한 관찰과 생각과 경험 없이는 쉽게 얻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디자인은 수행될 때마다 그 대상과 포함하는 영역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모든 디자인에 똑같은 시야의 폭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가 ‘그것을 몰라도 혹은 지나쳐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해하고 있어야 부지불식간에 놓치는 것들을 하나라도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놓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안 좋은 결과’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그것이 남들 다 하는 카탈로그를 디자인하는 것이라 한들 새롭게 시도하고 개척할 부분이 과연 없을까? 이런 생각 이전에 그는 벌써 카탈로그는 우습고, 그렇기에 다른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선입견적 단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할까? 그의‘무시’는 스스로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고 말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남들 다 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일은 - 창작자에게 맡겨진다면 -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자인은 사회의 미적 수준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그런 측면에서도 생활과 디자인의 관계가 면밀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가 제아무리 멋들어진 생각과 결과를 내어 놓아도 사회의 인식이 그것에 따라주지 못하거나 거부해버리면 그때부터 고군분투의 시간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년에 몇 번 되지 않게 값비싼 공연이나 뮤지컬 등을 보며 문화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밥그릇은 매일 사용하고 있다. 규모가 큰 공연의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적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활에서 밀접하고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소소한 디자인이 더 잦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당장은 작은 영향인 것 같아도 두텁게 쌓여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디자이너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생활이 내포한 다양한 층위를 면밀히 관찰하게 되고 자신의 디자인과 그 층위들을 연결하게 된다.

생활과 디자인의 연관성을 기억하는 디자이너는 소소해 보이는 영역의 디자인이 주어졌을 때, 우습게 알고 ‘대충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맥락과 층위의 숲을 헤쳐가는 여행자의 들뜬 모습마냥 기꺼이 탐구하고 고민하여 좋은 결과를 내 놓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덩어리를 만들고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유들에서 나는 디자인 안에서 생활과 관련된 것들, 혹은 소소하다고 쉽게 치부되는 것들 사이에서도 치열하게 의견이 오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길 바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과 연관된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만큼 그 주체인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다양한 주제의 열띤 불꽃이 일어나길 바란다.


# 아량과 비웃음

디자인에 아량이 적용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적어도 제대로 디자인하고자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사정이 힘든 사람에게 디자인을 해주면서 디자인 비용을 경감해 주거나, 아주 좋은 혹은 혁신적인 일인데 넉넉하지 않은 사정의 행사를 저렴하게 지원하는 데는 아량이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을 평가하고 수정할 때 아량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무시이다. 지적해야 할 것, 알려줘야 할 것, 비판해야 할 것을 덮어둔 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얼굴만 웃고 있을 뿐, 상대방의 발전 가능성을 무시하고 차단하는 행동이다.

냉정하고 철저한 분석과 비판 의식은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끝없는 자기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때 지속적인 자기비판과 반문, 정당한 의심, 왜 라는 질문, 다른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실천… 굳이 정리하자면 올바른 집요함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디자인이 여전히 젊은 분야로서 진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준다.

이는 디자이너로서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디자이너로서 직분을 수행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어진 디자인 과제를 마쳤으면 직분을 수행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저 의뢰에 대한 반응을 마친 것이지 직분을 수행한 것이 아니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그 디자인이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 그 목적이 가 닿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 사이 공간에 존재하는 수 많은 층위는 무엇이고 어떤 영역과 연관되어 닿아 있는지, 디자이너로서 새롭게 고려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없는지 등을 뇌세포와 심장 세포가 타 들어가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분해하고 재조합 한 후 그것을 적합한 결과로 내어 놓았을 때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유는, 디자인은 단순히‘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디자인에 아량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스스로 무뎌져야 할 이유가 디자이너에게는 없다. 또한 삶과 디자인을 진심으로 충실하게 대하는 디자이너라면, 이런 디자이너로서의 직분을 간과할 리가 없다. 그는 삶이라는 단어를 어설픈 디자인을 봉합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변명과 정당한 이유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을 결국 깨닫고 수정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런 올바른 철저함과 차가운 비웃음은 제대로 구분되고 있는가? 가끔 이 두 가지가 혼돈되는 상황은 없는가?


지난 글**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디자이너들에게로 돌아가 보자.


박씨가 가족을 언급한 것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한다”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이 디자인이 가 닿을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라고 생각하면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철저한 사람이다. 고민이 많고, 그 고민을 디자인에 제대로 녹여내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디자인에 대입함으로써 디자인이 가 닿을 사람들을 아주 폭 넓게 이해하고 세밀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얻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것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마피아나 악덕 재벌이 가족을 언급할 때는 자신이 하는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비겁하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인 것이지만, 디자이너인 박씨가 가족을 언급했을 때는 디자인의 대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끌어낼 꽤 현명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만난 디자이너가 “나는 디자인을 할 때 가족을 생각해.”라고 말했다고 해서 ‘음, 저 디자이너는 가족으로 자기 디자인을 합리화하고 있군.’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가 왜 가족을 언급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수는 없을까? 궁금해하면 묻게 되고 묻게 되면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과 상황을 재단하고 있지 않는가?


클라이언트를 두고 일하는 장씨를 보자. 그가 클라이언트와 일한다고 해서 클라이언트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디자이너로 폄하되어야 할까? 물론 그의 디자인 결과물 혹은 과정을 살펴본 후에야 정당한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무슨 수로, 어떤 이유로 그가 어떤 디자이너인지 판단한단 말인가? 장씨를 언급한 것은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사이에 이루어지는 디자인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나 무시를 꼬집기 위함이었다. 클라이언트를 둔 디자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 생각 없이 맞춰주기만 하는 디자이너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피하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뛰어들어 상황을 개선하고 변혁을 꿈 꿀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클라이언트 없이 일을 도모하고 뭔가 만들어내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면 상관 없다. 그러나 클라이언트를 둔 디자인에 대한 편견으로 그것을 피하기만 한다면 디자이너에게도 디자인에도 모두 손해이다. 올바른 비판은 그것을 외면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직접 마주하고 의견을 주고 받고 개선할 용기도 갖춰야 제대로 된 비판이 나오지 않겠는가.

클라이언트를 두고 이루어지는 디자인은 사실 이미 디자인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한 번에 없앨 수 있는 부분도 아니거니와, 생활의 많은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디자인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디자인들은’ 무시하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면밀히 살펴져 평가되고 집요하게 수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비평과 비판은 클라이언트를 둔 디자인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개 디자이너가 무슨 힘이 있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일개’라는 단어를 앞에 붙임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대단한 변혁을 당장 이루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시도할 가치조차 없는 것인지.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

인하우스 디자이너인 곽씨는 종종‘그저 하청만 주는 디자이너’로 취급되곤 한다. 많은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곽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묻고, 그의 생각도 들어 보고, 변혁이 필요하다면 움직여야 하지 않는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현실이 이러 저러하다고 한들, 움직이는 사 람과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결국 자명해진다.


얼마 전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디자인팀과 만났다. 보통 그런 단체라면 너무 수수한 디자인을 보여준다는 것이 사람들이 가지는 흔한 생각이다. 흥미롭게도 그 단체는 지적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 지적장애인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디자인을 활용하고 있었다. 훌륭한 영상으로 장애인들이 화장실을 사용할 때 어떤 일을 겪는지 사람들이 깨닫고 환경을 개선하게끔 몇 년에 걸쳐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심지어 지적장애인들이 읽기 편한 서체를 서체 회사와 함께 연구하고 실제로 서체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단체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한 명의 디자이너가 단체가 수행하는 일들에 디자인이 아주 효과적인 도움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굳은 의지로 노력한 결과였다.

보통 디자인은 주머니사정이 힘들어지면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 중 하나이다. 특히 이런 지원 단체의 자금사정이 좋기도 힘들다. 그러나 그녀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몇 년을 설득하고 애쓰며 지원군을 얻고 상황을 개선해서 결국 이루어낸 것이다. 그 결과를 본 사람들은 디자인이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시선

을 지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필자는 이 사례가 모든 디자인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가 속한 집단의 상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그에 속한 개개인을 무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집단이 지닌 특성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이 집단에 포함된 개인 또한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결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을 차가운 비웃음으로 무시할 근거가 내게는 없다. 차라리 가서 대화해 보고, 바꿔보자고 격려하고, 혹은 내가 직접 끼어들어 뭔가를 시도할 것이다.


어려운 이름과 이론을 모르는 최씨는 김형진씨의 언급처럼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아는 이를 반대로 무시하는 반지성주의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기 있는 또 다른 최씨는 모르기 때문에 기가 죽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가끔 어떤 디자이너들이 이렇게 푸념하곤 한다.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속상하고 자기가 바보 같이 느껴진다고 말이다. 그럼 필자는 질문한다.“왜 그렇게 느꼈죠?”대답은, 그걸 모르니 왠지 중심에 끼지 못하는 것 같고 아는 사람들이 대화에 끼워주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자, 여기에서 그렇게 어리석게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을 다독일 필요가 없다고 말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시선과 상관 없이 최씨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모르면 읽고 노력하면 되지, 기는 죽지 말라고, 자기 언어로 우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겠다. 남과 비교하기 전에 우선 무엇을 모르는지 묻고 알고 싶으면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말해 주겠다. 누가 알겠는가? 그가 처음 의 속도는 더딜지라도 알고 보니 끝은 창대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격려만 하는 부정적인 긍정으로 상대를 무뎌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윽박지를 이유도 없다. 또한 반지성주의만큼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수행 능력의 부족함과 메마른 결과물의 앙상함을 거대하고 거창한 말로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또한 지속적인 자기 점검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쯤에서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냉정한 비판과 평가는 타인보다는 자신 스스로에게 먼저 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는지,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지, 겉으로는 아무리 부정한들 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스스로에게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다르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적어도 타인에게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협의 여지가 없이 크게 잘못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한 번은 저 사람이 내가 짐작하는 대로 그런 사람인지, 그가 저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배경은 무엇일지 궁금해 하고 말을 걸어보고 대화를 시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 번은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하고 움직여보자고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냉정하게 비판해도 늦지 않다.

이것이 지나친 상대주의로, 디자인을 무디게 하는 행위인가? 격려와 북돋움을, 잘못 적용된 냉정함으로 엉뚱하게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 가장 중요한 것

쓸데 없는 무시, 비웃음과 다를 바 없는 아량을 제거하면 디자이너에게 무엇이 남게 될까. 이런 갖가지 다양한 감정을 제거한 채 디자인을 바라보면 결국 순수한 ‘디자인’이 남는다. 정말 생각해야 할 것, 고민해야 할 것만 남는다. 무시와 어긋난 아량은 허영심으로 쉬이 연결되고 허영은 핵심이 아닌 곁가지에 치우치게 하고 곁가지는 결국 필요 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니 그것들을 없애고 나면 핵심만 남지 않겠는가.


이제서야 순수한 ‘디자인’만 남긴 디자이너는 일 분의 일초를 사랑하는 듯 싸우는듯 디자인과 씨름하게 된다. 그 혹은 그녀에게 디자인은 더 이상 일이 아니고, 치열하다 못해 때로는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고되게 고민해야 하는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들은 그만두지 못한다. 그만 둘 마음이 없을 테니까. 애정의 대상이기에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고, 아끼기에 철저하게 비평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디자인 뿐만 아니라 타인의 디자인에도 애정을 갖고 비판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그 혹은 그녀는 ‘디자인을 만든 디자이너님’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 닿을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중심을 옮기게 된다. 그들의 자존감은 프로젝트의 크기나 명성, 혹은 돈과 같은 디자인 외의 것에서 오지 않고 디자인 그 자체에서 오게 된다.


필자에게 김형진씨와 글이 오고 가게 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즐거운 사건이었다. 디자인에 집중해서 디자인을 제대로 바라보고 수행하고자 하기 때문에 김형진씨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에 질문하고 글을 쓰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의 그런 수고로움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덕분에 나 또한 더 면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대화가 더 자주,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가기를 바란다.

 

 

* <지콜론> 2011년 5월호 130페이지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 김형진

** <지콜론> 2010년 12월호 98페이지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 최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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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안 공간에 대한 애정으로 디자인에 발을 들인 디자이너. 현재 영국에서 디자인에 대한 또 다른 탐구여행을 진행 중이다.

 

이 글은 최지안의‘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에 대한 답변으로 쓴 김형진의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에 대한 답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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