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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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청춘 그리고 디자인

/한정훈

 

 

 

회사에서 틈틈이 즐겨(?)보는 네이트의 급상승 관심 뉴스 순위에 꼭 드는 기사에는 첫 번째로 성 관련 기사이거나 두 번째로 정치인의 망언 기사이거나 세 번째는 성 관련 정치인 망언 기사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빠지지 않는 목록이 하나 있다면 노동자 또는 노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노동자에 대한 기사는 부정적이거나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힘들고 노동자이기 때문에 어려운…. 수 만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우리 사회는 매번 노동자 또는 노동이라는 단어를 낮은 위치에서 불편하게 사용한다.

최근 필자가 열심히 애독하는 트위터 타임라인에 흥미로운 글들이 올라왔었다. 허락을 받지 않은 관계로 전문을 옮길 수는 없지만 요약해서 이야기하자면 디자인의 허상을 위해 거짓된 단어들이 동원되지만 그런 말이 없어도 사실 디자인은 꽤 괜찮은 종류의‘노동’이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데스크에 앉아 하는 일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본인은 디자인을 노동이라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돌이켜보건대 디자인은 창의, 창발과 어울리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왔고 노동이라 함은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으로 생산라인 앞에서 나사 따위를 박는 일을 떠올리고는 했다.(아래에서 언급되겠지만, 육체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육체노동은 디자인에 있어 중요한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위의 140자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을 읽고 디자인은 미래, 혁신이기 이전에 노동이고, 경험과 사용자를 논하기 전에 그 가치에 대한 인식변화가 먼저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디자인의 상징적 가치를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선전, 선동하기 위해 곧잘 이용해왔다. 노동이라는 관점에서의 디자인은 그런 면에서 아무런 특장점이 없으며 언급할 대상에서 제외된다. 디자인은 항상 스마트한 미래를 위한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으며 잉여로운 내일을 위한 핵심 서비스 산업인 까닭에 노동이라는 전근대적인 가치는 창의, 전환, 혁신 같은 미래지향적인 화장법 아래 가려져야만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디자인이 꽤 괜찮은 노동임을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호 <지콜론>의 주제는 청춘이었다. 청춘에 관한 좋은 글들이 실렸고, 왕성한 젊은 혈기로 디자인을 위해 몸바치는 청년 디자이너들의 면면이 소개되었다. 기뻤다.‘열정노동’이라고도 하지만 순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이 대견해 보였고 몇 해 전 비슷한 고민을 하던 필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기사의 행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자. 문제는 역시 졸업을 앞두고 시작된다. 필자의 주변에 졸업을 앞둔 재학생들을 비롯해 그간 거쳐간 회사 내 인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목표는 대개 하나의 바람으로 귀결된다. 대부분 알아주는 미술대학 디자인과 출신이며 인턴 혹은 아르바이트로 업계의 생리를 일찌감치 깨우친 그들은‘잃어버리기에는 프라다 구두가 너무 크다.’라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졸업 후 유학을 다녀와 소규모 스튜디오를 열고,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클라이언트와 흥미로운 작업을 하며 가끔은 대학 강의로 머릿속을 환기시켜줄 지속가능한 녹색 미래가 아니라면‘남들처럼*(만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아니 그게 오히려 소박한 인생의 행복이라며 역설한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프라다 구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일 것이다. 대기업만큼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얘기하기에 덜 부끄러울 정도의 보수를 받고, 전셋값 폭등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커피와 어니언 베이글을 먹으며 새로 나온 아이패드를 주문해도 극복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도 가끔 그런 바람에 동조하고 나아가 불평 연대를 조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바람을 순진하게 옹호하기에는 업계 전체의 근본적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당사자들이 애써 모르는 척 감추어버린 이면의 과오가 존재하니, 그건 바로‘성급한 타협과 야망의 부재’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미술을 전공하여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 선언한 근원적인 이유 중 하나는‘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에 있을 것이다.“난 아버지 세대처럼 검은 넥타이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채 거대 자본의 파블로프 개가 되어 신자유주의에 앞장서지 않겠다. 고로 창조 계급의 구성원으로 활약하는 미래를 원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년이 지나 소수를 제외한 상당수의 청춘들은‘남들과 다르게’에서‘남들처럼’으로 목표를 수정하고, 인내하고 자립하려 하기보다는‘열정노동’으로 착취당할까 성급히 타협하고 결정한다. 이는 일정한 용기와 자부심, 희망을 필두로 하는 창조 계급이 되고자 하는 야망보다는 적당주의와 연계되어 진정한 의미의 소박한 삶에 자신의 타협한 삶을 은근슬쩍 바꿔치기 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누구나 가치관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 대상이 젊다면 그 폭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남들처럼 사는 소박한 삶’의 이면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청춘의 시기에야말로 더욱 끈질기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거기에 따르는 야망을 품을 필요가 있다. 사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성급한 타협과 야망의 부재’를 단순히 청년들의 프라다 구두에 대한 욕심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치사한 면이 없지 않다. 일종의 생득적 욕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하나로 필자는 첫 문단에서 언급했던 노동으로의 디자인에 대한 현 세대의 안이한 인식과 회피 모드에서 찾고자 한다. 앞서 디자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괜찮은 노동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은 고되고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노동임에 분명하다. 혹자는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기술이고 그것을 연마함으로 숙련도를 높여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통과의례처럼 일정 부분 디자인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고 그걸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일종의 투자가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희생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밝혀 두지만, 필자는‘소년이여 야근을 해라.’ 따위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자발적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연코 장담하건대 소수를 제외한 상당수의 디자인 전공자 혹은 사회 초년생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노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택에 필요한 필수 조건임에도 온갖 핑계거리를 갖다 대며 도망가기에 바쁘다. 예를 들면 ‘열정노동’같은 이야기도 온전히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인정하는 순간 현실은 불평으로 변화되어 돌아오고 노동의 가치는 멍청한 피착취인의 수고스러움에 그치고 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썼으나 막상 우리가 노동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 이러한 노력은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이 정도는 감수하라.’는 괴상한 족쇄로 되돌아왔다. 오늘날 면접관과 인사담당자, 상사와 갑느님들은 우리의‘열정’을 평가한다. 대체 어떻게?‘얼마나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가’로. 그 덕에 우리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 최태섭『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중

 

그렇다고 부조리한 현실과 영합하여 묵묵히 피착취의 대상으로 이 모든 걸 견뎌내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디자인 노동의 절대적 가치문제를 다른 현실적 문제로 인해 회피하고 적당주의와 연계하여 남들처럼 사는 소박한(?) 삶의 바람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인 양 내세우지 않았으면 하는 의중이다. 어쨌거나 젊은 당신들이 하고 있거나 하려고 하는 디자인은 꽤 괜찮은 노동이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디자인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올바른 디자인 가치관을 지닌 소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필자와 같이 졸업 후에도 사회의 세상적 조건에 이리저리 휘둘려 디자인이 꽤 괜찮은 노동임을 잊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다수의 청년 디자이너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아직도 노동의 가치를 의심하고 걱정하는 이들을 위해 장인적 접근법은 원칙적으로 모범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먼 포터의『디자이너란 무엇인가』중, 디자인 장인 꼭지에 나오는 레더비의‘인생에 대해 발견한 것들’을 덧붙이며 글을 마칠까 한다.

 

1. 인생은 봉사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2. 봉사는 별것이 아니라 보통의 생산 노동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3. 노동을 이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노동을 예술로 보는 것이다. 노동을 환영함으로써, 또 예술로 봄으로써, 노동의 노예적 성질은 기쁨으로 바뀐다.

4. 예술은 바르고 성실한 보통의 노동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그렇게 보면, 예술은 가장 폭넓고, 좋고, 필요한 문화 형식이 된다.

5. 문화는 비단 독서로 쌓은 교양만이 아니라, 조절된 인간 정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양치기, 선장, 또는 목수는 학자와 다른 문화를 향유하지만, 그들의 문화 역시 참된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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