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만화의 묘미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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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가기 전에 읽을 그래픽 노블

/ 박경식

 

 

 

유난히 비가 많았던 2011년 여름, 독자들은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8월의 무더운 날씨를 견디고 23일 처서를 지나면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니 끝자락이라 생각하고 잘 견디기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바캉스에 가 있든, 집에 선풍기 바람 앞에 죽부인 끼고 있든, 부채질 하든 찜통 더위 속에서 시간 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독서 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그래픽 노블 몇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연히 등골 오싹하게 만들 납량특집은 아니다. 아니, 그런 책은 몇 권 있지만, 공포감 조성보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어 줄 재미에 선정의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팥빙수 한 그릇 먹으면서 내용을 되새기는 게, 반나절 소일거리는 되리라 생각한다.

 

# 아스테리오스 폴립 (Asterios Polyp)

데이비드 메주첼리는 <배트맨 : 이어 원>이라는 미니시리즈로 유명한 그림작가이다. 1987년에 나온 이 미니시리즈 이후 별 다른 활약 없이 지내다가 2009년도에 발표한 창작물이 바로 <아스테리오스 폴립>이다. <배트맨 이어 원> 20년 후의 작품이며 작품간의 유사점은 거의 없다. 슈퍼히어로의 등장도 없고, 선과 악의 대립구조는 더욱이 없다. 오히려, 실험적인 접근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후후세대 정도 되는 서사구조로 난해하기 그지 없다. 주인공의 이름이 책의 제목인 이 책은 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야기의 전개는 마치 기법 위주의 작업에 가깝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디자인 명언“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에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다른 명제를 던진다. 곧“형태는 기능이며, 서로 따른다”, 난해하다고 느끼고 흥미가 느껴진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두어 번 더 읽고 곱씹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책이다.

 

# 배트맨 : 허쉬 (Batman: Hush) 1, 2

 

추리소설, 액션물, 느와르 장르에 관심 있다면 이 책은 절대적으로 필독서다. 배트맨을 좋아한다면 이 책은 이미 서재에 꽂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배트맨 캐릭터가 지난 70년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배트맨 : 허쉬>에서 직면하게 되는 총체적인 공격은 이전에는 없었던 살아남기 힘든 역경의 연속들이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 배트맨의 과거, 고담시 악당들의 총집합… 더운 여름의 더위를 싹 날려버릴 정도의 재미를 보장해준다.

그리고 국내에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재미교포 작가 짐 리의 그림의 완성도가 최고조에 다다른 시기여서 더욱 현란한 그림과 구성을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만화에 전적인 헌신을 선언할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길 바란다.

 

# 프롬 헬 (From Hell)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작가 앨런 무어는 <왓치맨>(1986), <브이 포 벤데 타>(1982-1985) 그리고 <스왐프 씽>으로 거장의 대열에 올라, 19세기 후반 런던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매춘부 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프롬헬>을 통해 에디 캠벨과 함께 난해함의 경지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작가나 아티스트가 주류를 벗어나 대중을 앞서게 되는데, 바로 <프롬헬>이 그런 징조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음모론이면서 추리극인 이 만화는 범인은 일찍이 밝혀지고, 영국 왕가와 관련된 동기까지 드러나는데,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 및 런던의 타락을 그리는 쪽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각 인물의 성격묘사보다 그들이 대변하는 군집들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이해를 수월하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급격하게 발전한 과학, 반유대주의 및 히틀러의 등장, 사회주의의 대두 등 19세기의 고리타분한 시대상을 외면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모더니즘의 대두를 알리는 시대극이라 할 수 있다. 면면히 살피면서 프롬헬을 읽어보면 칼 막스, 윌리엄 모리스, 오스카 와일드, 요셉 메릭 등 잭더리퍼가 살았던 당시 런던에 산 거의 모든 인사들이 등장한다. 이는 후에 집필할 그의 또 다른 야심작 <리그 오브 엑스트라오디너리 젠틀맨>의 습작으로 볼 수도 있다. 지적인 충격과 잔인한 살해 장면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작품을 원한다면 추천하지만, 반대적 취향이라면 추천하고 싶지 않은 그래픽 노블이다.

 

# 어둠의 도시들 (Les Cités Obscures) 1 ~ 4권

더위를 잊고 싶을 때 이 시리즈 한 권을 펴서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라. 어느새 이 세계에 빨려 들어가 줄거리와 구성에 몰입해 주인공들의 대화뿐 아니라 섬세한 풍경, 사람들의 의상, 이동수단 등 다양한 볼거리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특히,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건축물은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벨기에 출신 작가 스퀴덴이 아르누보적인 영향을 다양하게 활용하지만 다차원 지구에서의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다.

 

# 스콧 필그림 (Scott Pilgrim) 1 ~ 6권

형태는 여지없는 국내 만화, 그림 스타일도 약간 어색하지만 동양적인 만화가다. 스콧 필그림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전혀 숨기지 않는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오히려 만화에 더 실망한다고 하지만 실은 만화를 모르는 할리우드의 가식에 현혹된 문외한들의 발언이다. 오히려 작가 브라이언 리 오말리의 만화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한 시도가 이 작업의 진가를 느끼게 한다. 조금 해학적이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유머, 엉뚱하게 진행되는 전개가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든다. 전 시리즈를 다 읽고 영화를 본다면 더욱 흥미로운 여름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 샌드맨 (The Sandman) 10권

90년대 미국 만화는 일종의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마치 준비라도 한 듯 대거의 걸작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 중 단연 돋보인 작품이 있다면 닐 게이먼의 <샌드맨>일 것이다. 국내에서 10권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꿈의 세계에서 추상적인 개념들이 의인화되어 삶 자체의 갈등과 대립을 논한다. 미신, 신화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력이 스토리가 전개되는 공간인데, 현실까지 넘나들고 과거, 현재를 문을 열고 닫듯이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러나, 어른을 위한 만화임에 틀림 없다. 연재될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은 여자였으며, 20대 후반으로 다른 만화 타이틀을 읽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즉, <샌드맨>은 분명 만화 이상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새로운 독자층을 만들고 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 슈퍼맨 : 레드 선 (Superman: Red Son)

슈퍼맨의 탄생 신화를 알고 있다면 이 책은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미국 캔자스 주에 떨어진 로켓에서 슈퍼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소련 우크라이나 어느 농장에 떨어져 지구의 운명이 하루 빠른 자전으로 완전히 바뀐다.

배트맨, 원더우먼, 그린 랜턴 등 익숙한 캐릭터들이 다르게 해석된 모습을 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큰 사건들이 초영웅들에 의해 해결되며 끝내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익숙한 서사구조로 우리를 집중시키지만 서서히 하나씩 풀어지면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다가 찾아오는 후반부의 반전이 무엇보다 값지다!

 

# 자학의 시 1, 2

미국 만화는 아니다. 오히려 스콧 필그림보다 더 익숙한 네 칸짜리 만화인데, 읽어보면 익숙하지 않은 웃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밀려오는 가슴 찡한 감동은 무엇일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 두 권의 책은 네 칸 만화라는 뉘앙스와 사뭇 다른 형태의 만화이다. 세미콜론 사이트에서 자학의 시를 소개하는 글로 대신하는 게 낫겠다.

“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무척 일상적이고 사소하다. 그러나 그 사소한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무능하고 철없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결국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던 유키에, 야쿠자 조직원이었다가 한 여자를 위해 인생을 바꾸는 이사오의 절절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유키에를 짝사랑하는 식당 사장, 옆집 아줌마와 아줌마가 좋아하는 마을회장님 등 주변 인물들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아기자기한 재미와 감동이 있는‘우리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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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

대대로 물려줄 미국 코믹스를 모으는 박경식은 할 일이 없는 건지 할 일이 너무 많은 건지 오늘도 고심한다. 특히 철인 28호는 파산위기에 놓일 만큼 사랑하며 수집하고 있다. 커다란 LP음반이 반도 안 되는 크기의 CD로 확 줄어 들었을 때 심근경색 같은 고통을 느낀 앨범 재킷 수집가이기도 했으며, 각종 잡지와 디자인에 심각한 애정을 느끼는 디자인 마니아이기도 하다. 지금도 집에서 피규어들을 하나씩 먼지 털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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