젋은 디자이너 6인의 20세기 한국 디자인 탐험기

이토록 하찮은, 그래서 위대한 유산

국내의 디자이너들은 외국 디자인(디자이너)에 너무 쉽게 경도되어 왔다. 최신의, 새로운, 트렌디한 디자인을 보여줘야 할 그들의 소임이 자연스레 바다 너머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 우리 주변에는 최신 식의 디자인이 도처에 즐비하고 있다. 반면, 거기에 ‘나의 디자인’, ‘우리의 디자인’이라 불릴만한 것들을 찾아보기란 생각보다 힘들어졌다. 혹시 우리가 경험해온 20세기 시각문화와의 ‘유대’가 홀연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70~80년대 한국 시각문화의 영향 아래 놓이면서, 자체로 현재 진행형을 보여주는 디자인을 찾아보자는 기획은 그렇게 시작됐다. 구체적인 재료이자 영감의 대상으로 과거 한국의 시각문화를 이어 쓰고 있는 6명의 젊은 디자이너들을 만났다.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 _ 김기조

노안으로 오해 받는 장기하와 달리,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 디자인은 ‘안티에이징’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디자이너 김기조가 맡은 이 앨범 디자인이 노화를 두려워하지 이유는 다름 아닌 한글 레터링에 있다. 오래된 동네의 간판이나 동네 어르신이 손으로 쓴 주차금지 같은 글자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한글 디자인은 이미 시류로부터 훌훌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제도, 13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있었던 디자인이 트렌드 따위 상관할까. 시간이라는 보험이 약속하는 디자인의 노후 보장. 스물여덟 김기조는 이미 야금야금 연금을 받고 있는 거다. 에디터 이상현

일명 인디계의 서태지와 아이들, ‘장기하와 얼굴들’의 덕을 톡톡히 본 건 소속사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만은 아니다. 잘나가는 밴드의 음반인 덕분에 김기조의 디자인 역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글씨체가 촌스럽다거나 편집이 단조롭다는 멋 모르는 원성은 들었지만, 팬미팅 자리에서 ‘음반 커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는 디자인이 어디 흔할까. 정작 장기하는 디자이너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며 눙쳤다지만 김기조는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촌스러운 한글 글씨를 처음 본 사람들에게 ‘어, 이게 뭐지?’ 하는 낯선 반응을 끌어내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 셈이니까. 게다가 앨범에 쓰인 한글 폰트의 이름을 묻는 글이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왔을 정도니 글자 자체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했던 바람이 절반의 성공을 이룬 셈이다. 문화방송체가 아니냐는 질문에 디자이너가 직접 만들었다는 답변이 달려 있는데, 그 작성자가 김기조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실제로 김기조는 붕가붕가레코드와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다. 산울림이나 송골매와 같은 밴드들을 좋아했다는 그는 단지 옛 정서에 취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음악이 여전히 세련되며 오히려 당대로 이어지지 않는 점에 의문을 가져왔다고 한다. 군 입대 전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 디자인은 ‘내 꺼’라고 침을 발라놓았다는 말이나 붕가붕가레코드의 준비된 디자이너란 너스레가 괜한 소리만은 아니었던 것. 그렇게 소속 밴드들의 음악을 옆에서 즐겨 듣고 어울리는 꼴을 생각하며 완성한 디자인이기에 완벽한 ‘쿵짝’을 이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척추존재, ‘허파존재’와 나란히 붕가붕가레코드의 빠질 수 없는 ‘손가락존재’라는 그가 이들과 연을 맺은 건 서울대학교 밴드 동아리의 앨범 <뺀드 뺸드 짠짠> 디자인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여섯 음절의 앨범 제목이지만 뺀, 드, 짠, 이렇게 세 글자만 만들면 된다는 실용적인 생각으로 직접 글자를 디자인했던 것이 시작이 되어 주목할만한 한글 로고 타이틀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시간 순으로 살펴보자면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흔히 말하는 복고풍의 장식적 글자에서 간결하고 담백한 타입으로 정제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원인은 김기조의 달라진 생각 때문이다. 그는 ‘관악청년포크협의회’나 ‘청년실업’ 등의 앨범 작업을 술회하며 ‘과거에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에 대해서 스스로 그리 심각하지 못했노라고 털어놓는다. 해당 밴드들의 복고적 특징을 키치적으로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서 복고풍의 한글 서체를 동원한 셈이었으니까. 과거 것의 미숙함을 희화화하는 게 젊은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그는 이후 한글 디자인에 신중함을 더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장기하와 얼굴들’이나 ‘브로콜리 너마저’의 촌스러운 세련되며 예스러운 듯 젊은 로고 타이틀은 그 신중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자꾸 촌스럽다, 촌스럽다 말하기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정작 김기조는 이 촌스러운 글자들이 전혀 촌스럽긴커녕 세련되기가 라이선스 패션지에 사용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최신 트렌드를 다루는 기사 타이틀에 그의 촌스러운, 아니 세련된, 아니 촌스러운 듯 세련된 글씨가 사용되는 전복적인 상황을 꿈꾼다. 김진평 선생의 리더스다이제스트 제호 디자인마냥 김기조의 지큐, 김기조의 보그를 상상한다.

 

 

김기조가 한글을 디자인하면서 참고하는 레퍼런스는 과거 선생님들의 작업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래된 동네의 간판 글씨들은 여전히 영감의 대상이다. 실제로 동네를 찾아 다니며 버내큘러 디자인의 숨은 재미를 찾아내는 게 취미인 그는, 이름 모를 생활 속 디자이너들의 솜씨에 감탄할 때가 많다. 이를 테면 글자 ‘휠’은 사람마다의 기지가 표현되는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고. 딱 보기에도 꽉 차는 글자 ‘휠’을 네모 칸 안에 넣다 보면 ‘ㅎ’과 ‘ㅟ’와 ‘ㄹ’를 운용하는 방식이 제 각각이라는 것. ‘ㅟ’를 잔뜩 키운 탓에 ‘ㄹ’이 상대적으로 무척 작아지고, ‘ㅎ’이 비대해져서 ‘ㅟ’의 글자 끝이 삐치는 식이랄까.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계산된 아름다운 서체는 가질 수 없는 어설픈 매력은 김기조의 한글 디자인에서 느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손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그 어설픈 매력을 살리기 위해서 김기조는 호주머니에 수첩을 들고 다니며 글자를 스케치하는 버릇이 있다. 레퍼런스를 옆에 두고 그대로 따라 그리기보다는 눈으로 기억으로 몸으로 체화한 감각을 손 끝으로 길어내는 데 집중한다. 그건 김기조가 문화와 호흡하는 방식이다. 그는 과거의 것을 현재로 ‘끼워 넣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쌓아 올리는’ 디자이너인 까닭이다.

 

과거의 얼굴을 촌스러움으로 규정짓고, 세련된 무엇으로 갈아치우기. 지금, 세간에 떠도는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정의하자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청계천 복원 사업이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 등을 떠들지 않더라도 디자인은 어느새 과거의 반대말이 되었다. 김기조 역시 해당 사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인터뷰 후 정리가 필요했는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존중 받고 싶으면 존중하자 정도가 되겠네요.>

 

 

* 다음 내용은 <지콜론> 12월 특집 기사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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