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사 바로가기

SPECIAL FEATURE
위대한 유산-나전칠기장 배금용 (해외배송 가능상품)품절

기본 정보
SPECIAL FEATURE
위대한 유산-나전칠기장 배금용
수량수량증가수량감소

개인결제창을 통한 결제 시 네이버 마일리지 적립 및 사용이 가능합니다.

상품 옵션
옵션선택
상품 목록
상품명 상품수 가격
SPECIAL FEATURE
위대한 유산-나전칠기장 배금용
수량증가 수량감소 0 (  )
total 0 (0)

이벤트

위대한 유산

나전칠기장 배금용

 

대한민국 명장이자 나전칠기칠장인 배금용(무형문화재 경기24호).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그의 인생에서 나전칠기는 생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차지한다. 10살 때부터 공방에서 나전칠기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혼자 공방을 꾸려 나갈 때는 잠자는 시간 두세 시간을 제외하고는 작업에 몰두했고, 현재는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교육이라는 주제를 들고 현대에 대한 전통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 뵈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소탈했던 그를 만나고, 굴곡진 인생을 담기에는 조금 짧은 대화를 나눈 후에 느낀 것은 그에게는 교육과 삶과 예술이 하나였다는 것. 정직하고 성실했던 생애가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한 작품 속에 새겨져 있었다.

 

에디터. 박선주 / 인물 사진. 최용준 / 자료협조. 만정공방

 

선생님은 어떻게 나전칠기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목수였어. 일제시대였는데, 전쟁이 나서 징역에 끌려 가셨지. 결혼을 안 하면 여자도 끌려가던 때라 어머니가 열일곱 살에 아버지랑 결혼을 하셨어. 전쟁에서 돌아온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때 내 나이가 여섯 살이었어. 너무 어렸을 때라 아버지 얼굴도 생각이 안나. 그렇게 전쟁고아가 된 거지. 어머니는 스물한 살이고, 나는 3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쑥 캐다가 쌀겨에 버무려 먹는,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어.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어머니 친정집에 우리 가족이 가 있었는데, 정읍에 고아원이 하나 있었어. 거기 가면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거야. 지금 기억에는 한 오백 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아, 전쟁고아들이. 어머니는 고모라고 속이고, 나하고 남동생을 맡기려고 했는데 동생은 절대 안 떨어지려고 해서 결국 나만 고아원에 맡겨졌어. 그 얼마나 그랬겠어. 짐승도 어미랑 떨어지면 그런데.

그렇게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구구단 ‘오 구 사입오’까지 딱 배우고 고아원의 형들이랑 도망을 쳤어. 내 고향이 고창이라는 건 어렴풋이 아니까 걷고 걸어서 고창으로 가는데, 가본들 어찌 찾아. 그러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도 했지. 매일 아침 먹고 나무 한 짐 지고 점심 먹고 나무 한 짐을 또 해가지고 오랬었어. 그 때 내 나이가 열 살이 었는데, 나무를 지고 도랑을 건너면서 다 엎어지고 다시 지고 건널라 치면 또 엎어지고, 그러다가 집에 가면 된통 혼이 나고. 가을쯤엔가, 산을 타고 다시 도망을 나와 고창 쪽으로 갔어. 밤이면 멍석을 둘둘 말고 자고 아침이면 밥 얻어 먹으러 다니는 그런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외삼촌을 우연히 만난 거야. 터미널에서 웬 포마드를 바른 신사랑 딱 부딪혔지. 알고 보니 서울로 이사한 외삼촌이 고아원에 있다는 나를 찾아 고아원에 갔다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가려다 나를 만난 거였어. 그래서 그 삼촌을 만나가지고 서울에 온 거야. 서울 외삼촌 댁이 단칸방이었는데, 거기서 할머니, 삼촌, 외숙모, 작은 삼촌들에 나까지 여섯 식구가 살았어. 마포 공덕동 산동네였지. 외삼촌 댁 근처에, 뒷집인가에 예쁜 꽃병에 자개를 놓는 나전칠기공장이 있었어. 그 공장에서 일하게 된 거지.

-菊花 Ⅲ

그 공장(당시에는 공장이 현재 공방의 개념이었다고 한다.)이 선생님이 처음으로 나전칠기를 접하게 된 곳이군요.

그렇지. 공방도 단칸방만 했어. 만주, 대구, 부산 등에서 피난 온 선생님들이 한 스무 명은 계셨는데, 그중에 정말 뛰어난 양반들이 계셨지. 한 6개월쯤 지나니까 다들 공장을 차려서 서울 시내로 퍼져 나가더라고. 그 선생님들에, 임시로 거쳤다가 가는 독립운동 하시는 선생님들에, 애들까지 한 30명은 되었어. 사람이 그렇게 있으면 물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내가 물을 길러 다녀야 했는데, 항아리가 내 키만 했어. 그런 걸로 두세 개가 있었지. 물 긷는 곳까지는 두세 정거장 거리이고. 산동네인데, 낮이고 밤이고 물을 기르는 거야. 54년도에 내 나이가 열한 살이었지. 우리 손자들 보면 우습다니까, 내가 어떻게 저 때 물을 길러 다녔나 싶어서.

 

그곳에서 기술은 안 배우시고요?

옛날에는 기술 안 가르쳐 줘, 내가 알아서 하는 거야. 한 2년인가, 3년인가 지나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버렸어. 그리고 선생님하고 나만 남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개인지도로 가르쳐주시더라고. 고 최준식 선생님인데 나한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야.

이게 선생님을 누구를 만나느냐가 무진장 중요한 거야. 학교도 그렇잖아. 중국 영화에서도 도사한테 배우는 거랑 도사 밑에 있는 사람한테 배우는 거랑 다르잖아. 역사적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맥이 있는데, 다른 데서 배우면 같은 나전칠기라도 어떤 기술은 절대 몰라. 지금도 그래.

-나전모란당초문함(주칠)

그럼 그 전까지는 일하면서 보기만 하신 건가 봐요.

잠깐, 잠깐씩 배우곤 했지. 그래도 머리가 좋았던 것 같아. 열 명이 똑같이 기술을 배우면 거기서 천재가 한두 명밖에 안 나와, 공부도 마찬가지 잖아. 왔다 갔다 얼굴 도장만 찍는 애가 있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살피는 애가 있는데 거기서 천재가 나오는 거야.

나는 학교라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끝이고 미대도 가본 적이 없지만 저렇게 그림을 그려서 작품을 만들어. 중국집에 가든 어느 음식점에 가든, 일단 가면 그릇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 하다못해 이런 컵 하나를 봐도 함부로 안 봐. 길을 가도, 백화점을 가도, 남의 옷에 옷깃도 유심히 보고. 여기 있는 작품들 중에서 그렇게 아이디어를 얻고 응용해서 나온 게 많아. 자다가도 새벽 한두 시에 일어나서 꿈에 나타난 걸 그린다고 그려놓곤 하는데, 아침에 보면 별 필요가 없기도 해. 문화재가 되기 전에는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안 잤어. 내가 대학도 안 나왔지, 그렇다고 재산도 없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기술로서는 1인자가 되야겠다 싶어서 엄청난 노력을 했어. 아침 9시까지 자고, 술 취했다고 이튿날 작업장 안 나갔다면 문화재니 명장이니 안 되었지. 나전칠기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수백 명인데, 어느 분야에서 1인자가 되려면 뭔가는 특출한 게 있어야 되거든. 하다못해 술을 마셔도 친구들한테, 후배들한테 들으면서 배울 게 많아. 그냥 대화를 나눌 때도 건성으로 안 해. 그런 게 남들과 좀 다른 부분인 것 같아.

 

다시 돌아가서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나요?

19살 때 내 공장을 차리고, 그 다음부터는 남의 밑에는 안 들어갔어. 87년도에 결혼을 하고, 집사람은 파출부로 일하고, 나는 자본도 없으면서 나전칠기에 미쳐서 빠져 있었지. 먹고는 살지만 맨날 빚만 지니까 안되겠다 싶어서, 이제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같은 해인 87년도에 작품을 2점 만들어서 대한민국공예대 전에 냈어. 나라에서 하는 건데 원래 공예대전은 옛것을 발굴해내는 게 목적이야. 뭘 봐야 만들 텐데, 우리나라에는 작품이 없었어. 교보문고, 을지문고, 종로서적, 명동에 있는 서점들 다 뒤져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일본 가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책이었어. 거기 한 작품을 보고 재현을 하는데, 중간에 책 집어 던지고 막걸리 먹으러 가기 일쑤였지. 아무리 봐도 도저히 안 되더라고. 그래도 결국은 고생 끝에 만들어서 출전을 했는데, 며칠 후에 동아일보에 내 이름이 나왔다는 거야. 2점이 다 입선을 했었어. 초등학교 다니면서 상장 한 번 못 타본 사람에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지라 너무 좋아서 자다가도 웃고 버스 타고 가다가도 웃곤 했어. 그 다음 번인 89년도에도 2점을 냈는데 합격이었고, 그 다음 번에도 또 합격이었어. 그런데 일년에 상장을 6, 7개를 타도 나는 여전히 돈이 없고 집사람은 파출부를 다녀야 되는 거야. 선배들이나 후배들은 나 보고 미쳤다고, 그렇게 어려운데 뭐로 작품 활동을 하냐고. 그러다 1992년도에 문화재 신청 서류를 받아다가, 내가 또 그때 서류 꾸밀 줄을 몰라 고생하다가 남의 도움으로 신청을 하고 문화재가 되었어. 지금은 욕심이 뭐냐 하면, 로또가 되면 큰 건물을 지어서 작품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와서 배우고 체험할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어. 지금도 그렇게 하긴 해. 그리고 나도 고아로 살았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많이 하려고 해. 돈은 없으니 작품을 많이 내놓았지. 어쨌든, 대충 역사가 이래.(웃음)

-나전포도문이층장(부분) ©최용준

처음에 재현하셨다는 작품에 대해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고려시대 것인데, 임금님이 장인을 끼고 만든 것이었다 하더라고. 그때 거를 고려나전이라고도 해. 여기 보면 이렇게 금속선이 있지? 연장도 없던 그 시절에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학자들한테도 수수께끼래. 고려나전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변형이 되지. 상놈 부자들도 나전칠기를 갖고 싶으니까 막걸리 받아주고 엽전 주면서 만들어 달라고 한 건데, 그러니 다 보니 막 만든 거야. 그래도 학자들은 그것도 좋대. 그때 당시의 미술 감각이 있잖아. 그 맛이 있는 거지. 남대문에 나전칠기 파는 데 가 보면 이런 금속선이 절대 없어. 대량생산 제품이지. 우리 거는 하나씩밖에 없어. 매년 작품의 톤이 바뀌지. 한번 했던 건 안 해. 똑같은 전통 도안이라도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재미가 있지. 근데 또 아예 창작 작품은 처음에만 좋아. 일본 물건이 그래. 옻칠색깔도 처음에 볼 때는 기가 막혀. 근데 금방 싫증 난다니까. 전통 것은 가지고 쓸수록 매력이 생겨. 그 가치가 그렇더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어디 돌아다녀도 이렇게 금속선 넣은 게 없어. 공정이 되게 오래 걸리는 건데 내 작품에는 다 들어가 있어. 똑같은 나전칠기라도 내 것다울 수 있게. 옛날에는 누가 한 건지 잘 몰랐지만, 요새는 문화재청에 등록을 하고 다 낙관을 찍긴 하지. 그러니까 지금은 잘 만들어야해. 안 그랬다간 후세에 가서 뒤지게 욕 먹어.

-고려나전국당초문경함

87년도 대한민국공예대전에 출품하기 위해 책을 보고 재현하였다는 작품

 

 

 

이어지는 기사는 2012년 2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review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

Q & A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

shipping, exchange, return guide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상품은 입금 확인후 배송해 드립니다. 다만, 상품종류에 따라서 상품의 배송이 다소 지연될 수 있습니다.

교환 및 반품이 가능한 경우
- 상품을 공급 받으신 날로부터 7일이내

  단, 포장을 개봉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가치가 상실된 경우에는 교환/반품이 불가능합니다.
- 공급받으신 상품 및 용역의 내용이 표시.광고 내용과
 다르거나 다르게 이행된 경우에는 공급받은 날로부터 3월이내, 그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0일이내

교환 및 반품이 불가능한 경우
- 고객님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등이 멸실 또는 훼손된 경우.

   단, 상품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는 제외
- 포장을 개봉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가치가 상실된 경우
- 고객님의 사용 또는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하여 재판매가 곤란할 정도로 상품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복제가 가능한 상품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자세한 내용은 고객만족센터 1:1 E-MAIL상담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고객님의 마음이 바뀌어 교환, 반품을 하실 경우 상품반송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