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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in Conversation: George Lois

Interview By 이우진 + Joseph Burwell

에디터. 유인경, 디자인. 나은민

 

 

1951년 한국 전쟁은 조지 로이스(George Lois)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 방문이었고, 그 이래로 이제껏 한국 사람들과의 친분 역시 전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지난 3월에 있었던 그의 새책 출판 기념 강의에서 만난 한 명의 한국 디자이너를 기억하는 이유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맨해튼 사옥에서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가 한국의 전통 민요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본문은 미국의 50년대, 60년대 - 뉴욕, 매디슨 애비뉴 광고계를 이끈 거장, 조지 로이스와의 두 시간여에 걸친 대화이다. 그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디자인의 상관 관계, 보기 좋은 배열에만 치중하기보다는 솔직하고 간결한 표현을 통한 보다 설득력 있는 콘셉트의 추출, 그리고 그의 많은 작업들의 배경이 된 그의 강한 신념의 출처, 이들이 그의 타고난 직관력과 더불어 빅아이디어의 광고로 승화되는 동시에, 인종차별주의, 섹시즘, 그리고 전쟁을 이슈로 한 사회의 인식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다.

전형적인 질문과 답변의 인터뷰 형식을 넘어 우리가 만들어 낸 이 각각의 특별한 이야기들은 항상 무언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우리의 기대치를 훌쩍 넘어서는 마무리를 가져왔고, 지금도 내 가슴을 뛰게 한다.

 

Since his time as a soldier in the Korean War in 1951, George Lois has never been back to Korea. Neither has he had any other interactions or experiences with Korean creative people. That’s why he remembered the Korean designer at his lecture in March about his new book, Damn Good Advice.

This text is from my two-hour conversation with George Lois, a creative pioneer in the New York Madison Avenue ad industry in the 50’s and 60’s. He gave us a glimpse into the core of his convictions, around which many of his designs are based. In fact, George has a unique approach to design, which is less concerned with the tasteful arrangement of information, and more focused on straightforward concepts that often revolve around his convictions. He has an intuitive sense of how to grab your attention, and has used it to create ads for his clients’ products as well as to provoke social changes on the issues of racism, sexism, and war. We didn’t always stick to the typical question-and-answer format, but we did always end up talking about something fascinating, unpredictable, and memorable.

 

1. George Lois with his father,

Haralambos Lois, in front of the family florist shop in the Bronx,

1972

 

아버지

“Racist, Irish. 내 어린 시절은 인종 차별주의가 만발하던 아일랜드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시작되었지. 아마도 당신에게는 별반 큰 차이 없는 내용처럼 들리겠지만 말이야.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30년대, 인종 차별주의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 그 이상이었지. 그러한 환경에서의 나는 플로리스트인 아버지를 가진 그리스의 소년이었고, 10마일 이내에 그리스 이민자 가족이라곤 단지 우리뿐이었어. 주변의 친구들은 나를 유럽 남부 출신자를 부르는 아주 모욕적인 표현인 greaseball이라 놀려댔고, 그에 맞서 백 번도 넘는 몸싸움, 그런 싸움을 나름대로 즐기면서 자랐지. 내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그때 그는 젊은 흑인을 가게에 고용하여 꽃을 배달하는 트럭을 운전하게 했고—그 당시 사람들은 흑인들을 ‘Negroes’라고 불렀지—많은 이웃들이 찾아와 흑인을 고용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곤 했어. 어느 날 이웃 성당의 아일랜드계 천주교 신부가 우리 가게에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어. 아버지를 도와 대부분의 꽃 배달을 담당했던 나는 그 성당에 야자수를 배달하기도 하고, 가끔은 꽃을 빌려주기도 했지. 그것은 주말의 나의 주된 일과였고, 동시에 내 아버지의 비지니스 차원에서 보자면 성당은 큰 거래처 중에 하나였어. 그 신부는 아버지에게 그 젊은 흑인을 가게에서 내보낼 것을 요청했고, 신부의 요청에 화가 난 아버지는 ‘당장 내 가게에서 나가시오!’를 외치며 그 신부를 내쫓아 버렸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자랑스러웠어… 결국 그 일이 있은 후에 우리는 그 큰 거래처를 잃었고, 당시 9살, 아니, 10살 정도 된 어린 나에게 이 사건은 내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억이 되었지. 그리스 이민자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서로를 대적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근면했던 우리 아버지의 윤리적인, 도덕적인 가르침 아래 신념 있게 성장할 수 있었어.”

 

Father

“I grew up in a racist Irish neighborhood. Racist, Irish. That’s redundant... I mean back then it was. But back when I grew up in the 30’s, I mean it was so beyond blatant, it was everywhere. I was a Greek kid growing up and my father was a florist. We were the only Greeks within 10 miles. So, I was a greaseball... about a hundred guys said that to me. I had hundred fights, you know, I enjoyed every fight. My father was tremendous. He hired a young black man…back then they were called Negroes, he hired a negro to work at the store, to drive a delivery truck. A lot of people in the neighborhood came to him and said, ‘you know what… in this neighborhood…’ Finally the priest at St. John’s, an Irish catholic neighborhood, came to us… Every Sunday I used to bring palm trees to them. I used to rent to them. I used to carry them four blocks…Palm trees for the services … and flowers to set in them. It was a big thing for my father’s store. Sunday morning I spent all my time delivering them. Anyway he came to the store and he said to my father, he said ‘Mr. Lois, you do not want’, he said the word nigger, ‘niggers in this neighborhood.’ My father threw him out. I mean I was so proud of him. Told him to ‘Get out of my store.’ You know, and we lost the account. I’ll never forget it. I was about 9 years old, 10 years old. I’ll never forget it. Anyway a Greek immigrant, because immigrants became very racist too. Against each other. So I grew up with a work ethic, a moral ethic … because of my father. Hard working Greek immigrant.”

 

George, 너 10센트 있니?

“나는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 같아. 내가 다녔던 공립학교는 나름대로 괜찮았어. 좀 보수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선생들은 아주 멋졌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브롱스에 있는 공립고등학교인 DeWitt Clinton으로 진학을 할 예정이었어.

어느 날 나의 7학년 미술 선생이었던 Ida Engle이 나에게 물었어. ‘너 10센트 있니?’ ‘네, 그런데요….’ 그 당시 5센트가 지하철 뛰어 넘었고, 지하철 출입구를 뛰어 넘을 수 없을 만큼 큰 사이즈의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를 배달했던 일을 제외하면 정말 한번도 요금을 내본 적이 없었지. 그녀는 나에게 ‘135가, Convent Avenue에 있는 High school of music and art에 가라’며 위치를 설명해주려 했지. 그곳은 꽃을 배달하며 맨해튼을 활보해 온 나에게는 눈에 보듯 훤한 동네였어. 그리고 그녀는 ‘이 그림들을 가지고 가서 시험을 봐라’ 하며 그녀 손에 쥐고 있었던 검정색 포트폴리오를 나에게 건네 주었어. 아마도 2달러는 훌쩍 넘어 보이는 포트폴리오였고—그 당시 2달러면 꽤나 큰 돈이었지— 그 안에는 백여 장 남짓한 나의 그림들, 8세, 9세, 10세, 11세, 그리고 12세를 지내면서 그려왔던 내 그림들이 들어 있었어. ‘이 그림들을 가지고 가. 그리고 그곳에서 공부하도록 해. 그들은 아주 훌륭하단다.’ 알렉산더가 아리스토 텔레스의 발치에 앉아 공부한 이래로 그곳은 정말 가장 훌륭한 배움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지. 그녀의 말대로 훌륭했어.”

 

George, do you have 10 cents?

“I was incredibly lucky because I had a public school teacher. Public school back then, they were terrific schools. I don’t know how you have a better school than I went to. It was just a normal Bronx public school. I remember they were great, I hought that they were terrific, and very strict. Mostly women. was about to graduate Public school and I was gonna go o High school in the Bronx, DeWitt Clinton, a normal high chool, you now, kind of a rough, tough high school. But so shat?

She came to me and she said ‘George, do you have 10 cents?’ 5 cents was a subway each way. It was 5 cents then. I said ‘Yes, Ma’mm.’ I never paid for the subway in my life. I used to jump over, with flowers. I wouldn’t even pay if I had a big wreath and I couldn’t jump. She said ‘Go to the High school of music and art.’ I had never heard of the school in my life. ‘It is on 135th Street and Convent Avenue.’ She started explaining where it is. I delivered flowers in New York. I knew every neighborhood. I said ‘I know exactly where it is.’ ‘It’s the High School of Music and Art. You take a test there. You’re gonna do wonderfully. But you have to bring drawings’. Then she said ‘Don’t worry’. And she had a string portfolio, you know, one of those, which she must have paid a couple of dollars for.

It was a lot of money back then. 2 dollars was a lot of money. And she said ‘Don’t worry. Take this with you.’ And she opens it up and there was about a hundred of my drawings that she had saved when I was 8, 9, 10, 11, 12 years old. She said ‘Take those with you. They’re brilliant. That’s where you’re going to go to school.’ I mean what a break! I mean it’s a great school. I say it was the greatest school of learning since Alexander sat at the feet of Aristotle.”

 

어머니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다지 유창한 영어를 하지는 못했어. 6살인가 7살쯤이었어. 어머니와 내 두 누이와 함께 싱싱한 닭을 사기 위해 딜렌시 스트리트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지. 거기에서는 닭장수가 살아 있는 닭의 목을 비틀어 죽인 후 그 자리에서 바로 팔았거든. 이게 1936년 일이야. 오래된 7번가 지하철, 어머니는 거기에 앉아 계셨어. 나와 내 누이들도.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어로 이야기 했어—어머니는 내가 영어로 이야기하면 이해하긴 하셨지만 늘 내가 그리스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하셨어—어머니와 누이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눴고, 바로 옆에 두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흘끔 흘끔 우리를 쳐다보면서, ‘이민자들이야, 망할 이민자!’ 내가 그들을 쳐다 봤을 때, 그들 중의 하나가 이렇게 말했어. ‘왜 너희 이민자들은 미국에 살면서 영어로 말하지 않는 거냐?’ 6살이었던 내가 이렇게 말했어. ‘Go fuck yourself!’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열차 안에 있던 30, 40명의 승객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고 모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둘은 당황해서 열차 밖으로 나갔고… 절대 못 잊지 ‘Go fuck yourself! 영어로 이야기하라고? 그래, 그 망할 영어로 이야기해줄게!’

6살 밖에 안된 꼬마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상상해봐. 하하. 우디 앨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근사한 장면 아니겠어? 평생 못 잊을 일이야. 어머니가 나중에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어. 그녀는 당신 자신이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아버지가 그리스어로 이렇게 말하더군. ‘우리 꼬마가 이제 어른이 다 됐구나’ 내게는 하나님이었던 아버지로부터의 칭찬이었지.”

 

Mother

“I remember my mother never really learned to speak terrific English. You know what happened to me once, I’ll never forget it. I must have been only 6 or 7 years old. My mother took us on the subway and we are going down to Delancey Street. She used to go way downtown on the subway and buy chickens. A guy would pick up a chicken and he’d kill the chicken… in the streets… I’m talking about 1936. But we’re on that subway, in the old 7th Avenue subway. They had straw seats. And my mother’s sitting here, and I’m here I guess, and my two sisters… And we’re speaking Greek. I had to speak Greek to my mother. She would understand me if I spoke [English, but], she said, ‘only speak Greek to me.’, ‘OK, Mama.’ They were speaking to each other, you know, quietly. And there were two guys standing up there. Two working guys I guess. And their eyes were going back and forth, looking at us like: immigrants, you know what I mean: fucking immigrants. I remember, I was 6 years old and I’m looking at them and… finally one of them said ‘Why don’t you people, you’re in America, why don’t you people fucking speak English.’ And, I was 6 years old and I said ‘Go fuck yourself.’ And the whole car, you know, 30 people, 40 people busted out laughing. And they all started clapping… and they walked out, you know, I’ll never forget, ‘cause they saw a little kid say ‘Go fuck yourself. You want me to speak English? I’ll speak fucking English.’ It would be a great scene in a Woody Allen movie. It really happened to me. I’ll never forget it. My mother told my father about it, but she didn’t say how proud she was of me. My father said in Greek, ‘No, no, no…You’re boy is a man.’ What a compliment from my father. My father was a god.”

 

한국 전쟁, 파시즘, 공산주의, 그리고 인종 차별주의

“파시스트로 불리던 이승만이 기억나. 그의 부대들 말이야. ROK, Republic of Korea. 막무가내로 대문들을 부수고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해서는 때리기도 하고, 그를 위한 행렬에 서게 하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거야. 그게 내가 기억하는 전쟁. 나도 내 생존을 위해서 싸운 거였지 미국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지. 한국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에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정부도 주의 깊게 관찰했었어. 그들은 나치, 파시스트들 같았어. 정말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지. 내가 아는 모든 상황들은 인종 차별주의 전쟁으로 돌변했고, 내가 속했던 부대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민간인들을 말이야. 나도 한 번 봤거든. 하마터면 나도 그 군인놈 머리에 거의 방아쇠를 당길 뻔했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어. 대포를 쏴대고,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누군지, 뭐가 뭔지… 신경쓸 겨를이 하나도 없었어. 매번 10명에서 20명쯤 되는 어린 꼬마 아이들이 떼를 지어 거리를 배회했었고. 네가 미국 군인이라면, 서울 같은 곳에서는—서울에 한 두어 번 간적이 있었어—정말 조심했어야 해. 사람들이 너를 공격할 수도 있었거든. 동물들이나 다름없었어. 부모들도 다 죽고, 먹을 것도 하나도 없었으니까. 정말 끔찍했어, 끔찍한 전쟁이었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사실 거기 있을 권리는 없다고 느꼈다는 거지….

한국, 정말 좋아졌지, 북한놈들은 정말 정신 나간 놈들이야. 나쁜놈들이지. 그러나 그 경험들 중 일부는 내가,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하기 위해 파시스트를 옹호한다는 느낌이었어. 아주 나쁜 환경이었어. 얼마 전 메모리얼 데이에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운 연휴를 보냈지만, 난 가만히 앉아서 그 친구들, 죽은 내 전우들을 생각했지. 뇌염이 사방에 퍼져 있던 때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많은 민간인들이 말이야. 우리 팀에서도 네다섯 명 정도가 뇌염으로 죽었지. 벌레에 물리면 그 다음 날은 거의 시체로 발견되었거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한국에 주둔 중인 부대가 얼마나 될까? 젊은 한국인들의 시각으로는 미국이 잘한 거라고 생각할거야. 잘 간섭했다고 말이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한도 공산주의가 되었겠지. 북한 사람들은 거의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정말 위험한 사람들이지. 그래서 결국 잘 마무리되긴 한 거지만 내가 한국에서 본 것은 정말 끔찍하고 잔인한 경험이었어.”

 

Korean War, Fascism, Communism, and Racism

“What I remember going over there is that Syngman Rhee was a fascist motherfucker, you know. And when we got back behind the lines, you’d see him, his ROK troops, ROK, Republic of Korea, breaking down doors and getting people out so they could parade and they would hit them and getting them to parade for Syngman Rhee. That’s what I remember. I remember, I remember fighting for a… I was fighting for my life. I wasn’t fighting for America. That was ridiculous. You realized that when you were there, That you’re helping protect the Korean people, but at the same time I am looking at the government: those guys were Nazis…fascists, you know, it was really confusing. All I know is in a sense it turned out to be a racist war. Our army killed a lot of people. A lot of civilians… They didn’t openly… I did see one once. I almost put it bullet to his head… watching him do it. There was a wholesale killing going on… We were bombing… artillery everywhere. We didn’t care where, who, what, young children… Many times I’d see like 10, 20 young kids… Really young kids… All boys; and they were like rat packs, roaming the streets. And if you were G.I, like in Seoul even; I went through Seoul a couple of times; you had to be careful, they would attack you…they were turned into animals. Because they had no parents, no food. There wasn’t much food there. It was terrible. It was a terrible war. What I am saying is, I felt that we had no right to be there. So that might not be popular with what… You understand as a young person.

As it turned out South Korea is doing damn good. Doing very well. And those North Koreans are the crazy sons a bitches. They’re terrible people. But I mean the experience being one of… I felt like I was, we were, defending a fascist against a communist. Fascist you know. And you were in harms’ way. Friends around me were getting killed. When we had Memorial Day in America, last week… Everybody had a good time, but I sit there, I think about all the guys, all my buddies that got killed… And on top of that, Encephalitis. A lot of people dying. There must been a lot of deaths; civilian deaths. Because in my outfit four, five guys died of encephalitis… They got bit by a bug, they were like almost dead the next day.

It’s an unending war, I mean, we still got, how many troops there? [From the] point of view [of] young Korean people, I would think that, you would think that we did well, America did well interfering, I would think. Because otherwise you’d be North Koreans…Boy those people up there are crazy… They’re truly crazy… They’re dangerous. So it’s all well that ends well. But what I saw going over there.“

 

 

A tiny ad in The New York Times for Rubin

"Hurricane" Carter

 

 

20 Times Square logo

 

 

 

 

* 본 기사의 전문은 <지콜론> 8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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