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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떠난 자리의 예술 물신

<핀 율 탄생 100주년전 - 북유럽 가구 이야기> 관람기

글. 조현신ㅣ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

 

2012년에는 유난히 북구 디자인 관련 전시가 많이 열리고 있다. 특히 북구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콘셉트의 전시가 인기 있는 것을 보면, 일상적 스타일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그만큼 커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흥미의 폭만큼 결핍이 심하다는 반증인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대림미술관의 <핀 율(FINN JUHL) 탄생 100주년전 - 북유럽 가구 이야기>는 관객 10만을 넘어 연장 전시까지 하면서 네 달 간의 긴 일정을 마쳤다.

전시 중반 경에 찾은 넓지 않은 공간은 층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성인 단체 관람객들로 거의 꽉 메워져 있었다. 생활과 밀접한 가구 전시이니 이런 활력있는 분위기도 어울리고, 기획의 참신성이나 다양성 또한 단연 돋보인 전시였다.

하지만 기획의 창의성이나 흥행성과는 별개로, 전시 자체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잘 셋팅된 상품의 매장 카탈로그의 한 장면, 혹은 약간의 예술적인 멋, 즉 난해한 코드가 자연스럽게 배치된 하이엔드 카페를 다녀온 느낌이라고 할까. 같이 간 비전문가, 즉 일반인이지만 해외 생활을 오래한 지인 왈, “왜 이걸 만원이나 주고 봐? 명품 가구 백화점이나 콘란 숍, 혹은 이케아 숍을 가지.” 전문적인 고유 영역이 공격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얼추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럼 왜 이렇게 갤러리라는 예술적 전유 공간에서 핀 율이나 그의 가구는 인기를 구가하는가. 한마디로 이 공간은 하나의 잘 만들어진 의자를 예술적 아우라를 갖춘 전시 장치를 이용하여 ‘예술 물신’으로 만드는 세례식 장소이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예술의 결합, 영역 간의 경계가 무너졌다고들 하니 좋다. 하지만 그 결합의 방식이 마치 디자인이 예술의 빈 껍데기를 차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니 은근 기분이 언짢다. 예술이 먼저 걸어간 그 길을 따라 예술을 찾아가 보니, 막상 그 예술이라는 것은 제 갈 길을 찾아 훌쩍 떠나버리고, 디자인은 그 텅 비어 버린 의자에 앉아있는 듯한 현실에서 오는 불만이리라.

 

예술적 장치 이용하여 예술 좇기

예술적 장치를 통해 어떻게 디자인 신화가 창조되고 물신화 과정이 이루어지는지 잠시 살펴보자. 첫째, 공간의 아우라가 이용된다. 즉 예술 전유물인 전시장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물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집안에서 내가 몸을 붙이고 앉고, 낡아질 것들이 박물관도 아닌, 박람회도 아닌 현대 미술의 핵심 전당에 들어와 있는 것은 멋지고 대단하다. 예술이 그동안 쌓아 놓은 장소의 권위를 단숨에 내 것으로 할 수 있다.

둘째, 전문가인 도슨트의 권위 있는 해설이 개입된다. 특히 이 전시에서 그들은 난해한 현대 예술을 설명하듯 의자 하나하나를 비교, 분석하고 설명한다. 롤랑 바르트는 패션 잡지의 문구를 분석하면서 하나의 드레스에 수사적이며 설명적인 말이 달라붙는 과정이 의상의 자연화, 신화화라고 했다. 이렇게 수사적 해설 과정을 통해 핀 율과 그의 물건은 언설의 아우라를 두른 비사물적 사물이 된다.

세 번째, 더 크고 강한 상징과의 결합이 사용된다. 이번 전시물 중 특히 재미있는 것은 덴마크 국왕이 앉았던 의자의 전시 형식이었다. 타슬이 달린 묵직한 커튼과 샹들리에가 호화로운 왕실의 풍경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에서 핀 율의 의자는 중앙의 높은 자리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셔져 있고, 국왕과 핀 율과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아직 지상에 남아있는 절대 신화의 영역, 왕족 판타지가 더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 디자인사가들이 근대 디자인은 사물이 지닌 위용과 상징성을 거부하면서 출발했으며, 대중적인 형태 언어로써 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고 강조하고 있기에 이런 전시 기법은 아이러니하게 보여진다.

네 번째, 신화나 판타지의 일상화가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핀 율 의자 앉아보기 코너가 있다. 위의 세 개의 장치가 신화적 광휘를 드리우는 과정이었다면 이 장치는 그 광휘를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만져볼 수 있는 일상적 물건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은은한 조명과 휘장을 친 무대 중앙에 핀 율의 의자가 놓이고 뒤의 스크린에는 핀 율의 일대기와 디자인이 크게 확대되어 배경 영상으로 흐르고 있다. 의자에 앉으면 도우미가 사진을 찍어서 미술관 홈페이지에 올리고 관객은 그것을 다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상품 물신의 최정점, 쉬운 말로 너무 비싼 가격으로 시장에서 배치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런 친화의 제스처가 일회성임을 무의식적으로 안다. 예술이 떠난 자리의 예술 물신마지막으로 핀 율 디자인 따라하기가 있다. 노트에 핀 율 디자인을 해부하여 실은 다음 그대로 조목조목 따라 그려보기, 그것에 영감을 받고 자신이 의자를 디자인해보기 등이다. 또한 핀 율 가구 사진으로 디자인 된 노트북, 연필, 가방 등이 판매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디자인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핀 율의 이미지를 판매하는 과정이다.

 

양식과 장치를 버린 현대 예술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가구는 예술적 광휘를 입고 예술적 사물이 된다. 하지만 그런 여정을 거쳐 당도한 자리에 있어야 할 예술은 정작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현대 예술은 이미 더 이상 우리가 해독할 수 있는 일련의 양식을 지니지 않는다. 양식이 해체되어 버린 개념과 해석일 뿐이다. 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예술가의 철학과 의미 규정, 그리고 물질 그 자체만 있으면 예술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진정 자유로워졌다고 이야기 했듯이. 그러므로 이제 예술은 형식이나 미적 쾌감이 아니라, 철학이며 사유이다. 예술은 그들이 추구해왔던 새로운 양식의 실험, 새로운 장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한 예로 핀 율 전시와 같은 날 전시가 끝난 펠릭스 곤잘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작품은 도슨트가 핀 율의 특성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준 ‘형태의 독창성’이나 ‘구조의 독자성’, ‘재질의 다양성’ 등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문서로 남겨져 있어 그의 지시대로 전시 스탭들이 예술품을 만든다. 문서에 쓰여져 있는 예술작품의 한 예는 ‘사탕을 3.4kg 진열하라’의 지시이며 게다가 장치에 대한 설명에 ‘변형과 해석의 자유로움’이 허용된다고 부가되어 있다. 사탕의 물질성, 색채, 형태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사탕 3.4kg이 그에게 무엇을 선사했으며, 왜 그가 그것에 집착하는지 설명을 들은 후에야 이해가 간다. 이때 그 대상은 사탕이든 아니든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과자라도 좋고, 초콜릿이라도 좋지 않을까? 건물 한 편에 놓여 있는 플라시보 사탕들을 먹으면서 3.4kg, 그의 연인의 몸무게 상실과 이어진 죽음에 관련된 그의 슬픔을 공유하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즉 그의 욕망과 상처와 사랑, 정치적 견해가 최소한의 물질을 통해 공유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만들어내는 형식상의 아름다움, 조화미 즉 일련의 양식 등은 사라진 것이다. 싸구려 사탕이 아름다운가? 적어도 팝아트까지만 해도 그 싸구려 사탕들은 양식을 형성했다. 하지만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의 말처럼 라스베가스가 완공되었을 때 팝아트는 종언을 고하였다. 그리고 예술에서 양식은 해체되어 버리고 제각각의 언어를 예술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영토로 끌어들인다.

 

종착지는 상품 물신의 자리

이 디자인 전시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렇게 예술이 버리고 가버린 어떤 자리, 즉 형태와 물질과 색채 등의 질서있는 쾌감의 그 자리를 디자인이 물려받아 신화가 되는 과정을 꼼꼼하게 보여주어서이다. 현대 예술이 양식과 장치를 입고 출발하여, 신화의 과정을 거친 후 해체되어 버렸듯이. 일상의 공간에서 상품 물신의 자리를 명백히 차지한 디자인된 물건들은 확장하라는 자본의 지시에 따라, 예술의 아우라를 입고, 예술적 물신의 자리까지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 전시는 결론적으로,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에 의하면 ‘컴퓨터 격자상의 하나의 선택’으로 되어 버렸다는 형태에 대한 칭송과 신격화를 보여주었다. 또한 근대 디자인은 ‘형태 가공자’로 출발했고 그 때문에 더 이상의 공동체적 이슈를 제기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갇혀버렸다고 한 칼 미첨(Carl Mitcham)의 지적, 거슬러 올라가 ‘디자이너의 신화’를 역사 속에 제공한 니콜라이 펩스너(Nikolaus Pevsner)의 역사관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또, 개화기 초기 백화점의 신기한 서양 물건을 구경하려고 30만 서울 시민 중 매일 평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스코시 백화점에 몰려왔다는 일화를 떠올리게도 했다. 이제 이 작품들, 좁게는 북구의 라이프 스타일은 예술적 신화의 권위를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명품 가구로 수입될 것이다. 그리고 에일린 그레이(Eileen Gray)의 라운드 테이블,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의 짝퉁 티테이블이 5만 5천원에서 55만원까지의 가격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팔려나가듯. 광고에서 북구 스타일의 가구가 집안 배경을 점령하듯, 예술 물신의 광휘로 출발했지만 결국 상품 물신으로 귀결되는 자연스러운 상품 순환 과정을 거칠 것이다. 결국 이 전시는, 서구에서는 현대 디자인이 시작된 이래 거의 100년 간 박람회며 교육을 통해 배포되었기에 이제는 이슈가 되지 못하는 스타일의 즐거움을 일상에서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디자인 결핍의 시민들이 벌인 감탄과 부러움의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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