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벽

: 벽으로 말하는 열네 개의 작업 이야기

 

. 이원희

사진. 정은지

인터뷰이. 이소영

정리. 이가람

 

 

 

작업의 과정을 담고 있는 캔버스

식물세밀화가(Botanical Illustrator), 이소영

 

계수나무는 잎이 노랗게 변할 때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그 냄새가 절정인 시기에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을 만났다.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숲과 국립수목원이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는 여러 종류의 텃밭을 가꿔도 좋을 만큼

넓은 옥상이 있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햇빛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이소영이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여러 권의 책, 넓은 책상, 곳곳에 줄지어 서있는 화분, 현미경과 각종 약품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무척 따뜻했다.

 

Eunji Jeong


 

 

국내에서 원예학이 주목받지 않았던 시기에 공부를 시작했고 식물을 관찰, 기록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국립수목원에 소속되어 세밀화를 그렸던 그녀는 최근 프리랜서로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꾸준히 해 왔던 일의 영역이 넓어졌을 뿐 담고 있는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전에는 주로 원예학적으로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녀의 작업을 찾았다면 이제는 식물 그 자체를 건강하게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그녀의 작업을 찾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는 것은 큰 축복이다. 과거의 기록으로 남을 것들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연구하는 것. 이것이 그녀가 하는 일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이소영은 맑다. 맑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식물이 떠올랐다. 식물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녀를 위한 작은 집을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고단한 날엔 푸근한 엄마 품이 되어주고 힘든 날엔 도피처가 되어주는 그런 집 말이다.


 

 

 

Eunji Jeong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식물세밀화를 그린다. 일종의 과학 일러스트인데, 식물을 식별하기 위해 형태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또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수집되는 식물을 이용해 표본, 사진 작업을 하고 식물 외에도

식물을 매개로 하는 곤충, 버섯, 동물 등의 생물 일러스트도 그리고 있다.

 

주로 어디에서 작업하는가. 동네가 미치는 영향이 있는가

작업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그 주변에는 광릉숲이 있는데, 광릉숲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이 서식하는 곳이다. 나의 일이 식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보니 식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업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작업실을 이곳에 마련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광릉숲에 가서 생태계를 관찰한다.

현장 외에서 이뤄지는 작업은 작업실에서 하고 있다. 이곳이 식물세밀화를 그리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인가

식물들에 물을 주는 시간이 가장 좋다. 작업실에 대략 70종의 식물 화분이 있는데, 종이 모두 다르다 보니

물을 주는 양과 시기도 각각 다르다. 물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하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즐겁다.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도 좋다.

 

 

Eunji Jeong


Eunji Jeong

 

 

당신의 작업실 벽을 묘사한다면

벽은 온통 흰색이다. 약간 미색이 도는 흰색인데, 이 벽을 배경으로 무언가를 두면 형태가 잘 드러나기 때문에

작업할 때 도움이 된다. 네 벽면 중 한 면에는 직접 재배한 허브 식물들을 줄에 매달아 말리고 있고,

시계방향으로 돌면 식물을 그리기 위한 온갖 표본과 사진들이 붙어있다. 또 다른 두 면에는 화분들이 벽에 바짝 붙어있다.

화분을 벽에 붙여두면 식물이 생장하는 변화가 잘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두었다.

 

당신에게 벽은 어떤 의미인가

작업의 과정을 담고 있는 캔버스.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필요한 표본이나 사진들을 붙여 놓고

직접 재배하고 있는 식물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벽은 나의 작업 과정을 담고 있는 또 다른 캔버스가 아닐까.

 

한 가지 종의 식물을 세밀화로 남기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나

식물종이 정해지면 해당 식물이 유사종과 어떤 형태적 차이가 있는지 논문과 자료를 조사한다.

, 자생지 정보를 찾고 그곳으로 간다. 이때 중요한 점은 자생지에 채집 허가를 꼭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식물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현장에서 최대한 많은 드로잉을 하고 크기를 측정한다.

채집 봉투에 채집을 하고 돌아와 나머지 그림을 그린다. 세밀화를 모두 그린 뒤에도 식물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다시 자생지에 가서 심어주고 만약 죽었다면 표본으로 제작한다. , 식물세밀화에는 꽃, 열매, 종자 등

생식기관이 모두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꽃이 피는 시기, 열매 맺는 시기에

다시 찾아가 기록하고 채집하는 작업까지 거친다. 이렇게 1년 이상 관찰해야 제대로 된 식물세밀화를 얻을 수 있다.

 

 

(중략)



Eunji Jeong

 

 

 

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게으름.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이다. 식물은 계속 변한다.

그 모습을 한 장에 담으려면 최대한 오랫동안 관찰해야 한다. , 자주 식물 자생지에 가야 한다.

하루, 이틀만 못 가도 개화나 결실의 모습을 놓쳐 버릴 수도 있다. 한 가지 종을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하는 작업이라 나태해지기 쉽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한다.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첫 직장이 국립 식물 연구 기관이다 보니 국가적으로 하는 연구가 많았다. 그곳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식물세밀화가로서 책임감을 많이 배우고 느꼈다. 식물세밀화는 식물 연구에 꼭 필요한 기록물인데

국내에는 식물세밀화가 소수이다 보니 그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어떤 막중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안고 있는 것 같다.

 

삶과 작업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나

친구들과의 만남. 식물세밀화가 과학과 예술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자칫 너무 과학으로 혹은 너무 예술로 빠지기 쉬운데 이 균형의 역할을 친구들이 맡아주는 것 같다.

친구 중엔 식물과 곤충, 버섯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작가, 요리사, 목공사와 같이

개인 작업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로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게 된다.

 

 

 

이소영, <가문비나무>, 2010


이소영, <Lycoris of Korea>, 2015

 

 

 

이소영

www.soyoung.kr

 

 

- 그리고 벽중에서.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인터뷰 전문과 다른 열세 팀의 인터뷰는 책 그리고 벽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자소개

이원희

정은지와 함께 <AVEC> 매거진을 만들며 주로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받아 적는 일을 한다.

꼭 답을 듣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지만, 예상하지 못한 답을 얻을 때가 더 많다.

가까운 미래의 목표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 쌓인 조용한 생활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정은지

이원희와 함께 <AVEC> 매거진을 만들며 <AVEC>라는 이름으로 기획, 출판, 제작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주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으나 디자인과 영상으로 작업의 범위를 넓혀 가는 중이다.

가까운 미래의 목표는 반려견 세 마리와 함께 전국 일주를 하는 것이다.

www.avecmagazi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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