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낭만의 디자인-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

g: Special Feature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

에디터. 박선주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 책과 잡지, 광고 등 다양한 매체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쓴다. 지은 책으로는 『도쿄 펄프픽션』과 『나의 지중해식 인사』, 일러스트집 『반칙의 제국』 등이 있다.

 

 

이강훈이 생각하는 낭만의 작품

Nègre attaqué par un jaguar (Negro Attacked by a Jaguar)

Henri Rousseau, 1910

Kunstmuseum Basel, Switzerland

 

개인적으로, 낭만의 의미는

여름의 끝자락 해질 무렵 골목을 걷다가 문득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나를 십수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으로 이끄는 경험. 족히 수천 번은 맡았을 비내음 중, 몇백 번째 그 비내음과 꼭 같은 비내음을 맡으며 그날의 일들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아찔한 경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찰스 스완이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는 순간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그리는 태국의 정글을 응시하다가 불현듯 느끼는 기시감. 낭만은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새로이 편집된 상태로 불시에 드러나는 찰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순간은 주로 지극히 짧고 강렬하지만 손 안의 연기처럼 금세 아련하게 희미해진다.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낭만적이라고 생각되는 작품 또는 작가가 있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궁금하다

리오데자네이루의 코르코바두 언덕에 있는 나이브아트 미술관에서 만난 무명 작가들의 그림, 상상 속의 원시 풍경을 묘사한 앙리 루소의 작품들, 태국의 정글을 무대로 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상들. 원시라는 단어는 어쩌면 내 유전자 속에 각인된 전래의 기억이 아닐까 싶은 정도로 언제나 강렬한 공명이 있다. 그것을 그대로 낭만이라고 일컫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다른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가공된 기억으로 인한 기시감을 제공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허정은의 그림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또 다른 의미의 낭만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2010년도 작품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의 스틸컷

 

untitle, 허정은, digital, 2008

 

일레스트레이션이라는 장르에는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정직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같은 점이 낭만적으로도 느껴진다. 오랜 세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해오면서 느낀 매력이 있다면, 그리고 이 분야에서 얘기될 수 있는 낭만은 무엇일지

일러스트레이션이 정직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작업이 예술의 영역보다는 일상 노동의 영역에 더 다가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 지점에 서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장르를 좋아한다. 클라이언트와 소비자(혹은 독자)라는 확고한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은 지극히 현실에 기반한 작업이다. 작업에 대한 피드백 역시 명쾌하다. 그럼에도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추측한다. 나는 그림노동자와 아티스트 사이의 그 모호한 지점을 넘나드는 유희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주어진 작은 특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즐기려고만 마음먹는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모호함이다. 그리고 때로는 두 상황을 뒤섞는 것도 가능하다. 다시 낭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미지가 주는 낭만은 예기치 않은 순간이나 시간 혹은 기억을 건드리는 작업이 아닐까. 그것을 건드리는 순간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러한 작업은 직접적인 의도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순간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Nighthawks)>를 보며 마치 언젠가 내가 저 테이블 어딘가에 앉아있었을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 공간의 인물들과 나누었던 어떤 대화가 희미하게 떠오른다면 그것이 바로 이미지가 제공하는 낭만이다.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주로 하고 있음에도 나는 자주 내 그림들 속에서 누군가가 그런 순간을 경험하게 되길 기대한다. 소설책의 표지를 그릴 때, 작품을 잘 설명하는 그림을 원하는 출판사의 기대와 달리 내가 자주 시도하는 것은 그 소설을 관통하는 어떤 짧은 빛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무척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지만 내가 느낀 그 찰나의 빛을 서점에서 책을 집어드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다면 그보다 짜릿한 순간이 또 있을까 싶다.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내 손과 감성이 서툴다는 점이다. 클라이언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실패하는 때가 훨씬 많다.

 

‘낭만’하면 나는 기억과 여행, 예술이 생각난다. 『도쿄 펄프픽션』, 『나의 지중해식 인사』의 작가이기도 하다. 여행이 작가로서의 삶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나에게 여행은 해소 불가의 욕구이자 욕망이다. 온전히 가질 수 없는 무엇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낭만이기도 하다. 삶은 여행, 이라는 낭만적인 표현보다는 실제로 떠나는 여행을 간절히 꿈꾸는 지리한 일상이 오히려 낭만적이다. 여행지에는 나의 일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삶들이 펼쳐져 있고 그것은 곧 나의 것들과 대비되거나 비교되며 하나의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또한 여행은 기억을 재생해내는 기능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새로운 장소와 환경은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때로 여행은 공상과 뒤범벅된 가공된 거짓 기억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내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내게 그것이 어떤 작업이건 간에 움직이게끔 만드는 중요한 동력원이다. 여행기를 출간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여행은 없다.

 

그렇다면, 낭만이 작가로서의 작업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여행이 나에게 중요한 동력원이라면 낭만은 창작의 발원이다. 그것은 글쓰기든 그림 그리기든 매한가지다. 불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기억의 조각들을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고 싶은 간절한 욕구, 그것이 없다면 과연 무슨 즐거움으로 쓰고 그릴까.

 

작업이 디지털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으로 느껴진다. 방식과 형식을 떠나 작업을 하면서 놓 치지 않으려고 하는 지점이 있다면

디지털로 구현하는 아날로그적 이미지들은 모두 훼이크(fake)인 동시에 오리지널이다. 그에 대해서 여전히 왈가왈부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뭐 어떤가. 디지털 매체로 작업을 하는 것은 턴테이블이 아닌 시디플레이어나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내가 아이폰 속에 담고 싶은 음악이 힙합이나 모던록이 아니라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 옛날 재즈이거나 삼바일 뿐이다.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디지털 매체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명관 작가가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타자기가 아닌 맥북에어로 썼다고 해서 놀라는 이가 있을까. ‘어떤 매체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표현하는가’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물론 그 둘 사이의 균형이 무척 중요하다. 균형은 그림을 그릴 때 내가 가장 신경을 집중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 작업 중에서도 낭만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몇 해 전 작업했던, 작사가이자 프로듀서인 박창학의 책 『라틴소울』의 뮤지션 연작. 소위 라틴음악이라고 에둘러 부르는 중남미 음악들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서인 이 책에서 나는 책에 소개된 주요 뮤지션들을 그렸는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물 작업들의 시발이 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뮤지션, 특히 오랜 기간 동안 한 장르에 몸담은 뮤지션의 인상을 단 하나의 컷으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무척 흥미롭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다른 부연 설명 없이 뮤지션의 얼굴 그 자체로 그의 음악이 들리고 그가 지나온 시간들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인물 그림 속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낭만의 의미에 가까이 닿아있는 작업이다.

 

꿈이나 계획 하나를 말해줄 수 있는지, 혹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면, 늦은 여름 해질 무렵 골목을 걷다가 문득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나를 십수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의 어떤 곳으로 이끄는 경험, 아마도 누구나 이따금 경험하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며 삶에 대한 의지를 일깨우는 중요한 힘이다. 어쩌면 나는 그 찰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꿈이 있다면, 그 단편적인 편린들을 모아 개연성이 있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한 번쯤은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 그것이 글이 되든 그림이 되든 혹은 그 둘이 합쳐진 무언가가 되든 간에 말이다. 참, 그리고 브라질로 건너가 바닷가 작은 마을에 정착하는 것도 내 오랜 꿈이다. 그것은 나의 원시에 대한 낭만의, 실현 가능한 타협적인 구현이기도 하다.

 

이강훈 작품

조앙 질베르투 Joao Gilberto

 

카를리뇨스 브라운 Carlinhos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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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기사는 <지콜론> 4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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