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남미_퓨마와 함께 정글을 걷다

19금 남미
그 남자 그 여자의 진짜 여행기



글. 신종협, 한가옥



“칠흑 같은 밤,
온전히 드넓은 사막 위로 별이 무리 지어 반짝였다.
나는 말문을 잃은 채로 대자연의 경이를 그저 바라보았다.
내 심장은 별이 발하는 빛의 리듬에 맞추어 뛰기 시작했다.”


여행 에세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문장 같은 시간은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감성이 오롯이 풍요로웠던 순간 대신, 라틴 아메리카의 맨 얼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음악에 대한 꿈이 부서졌던 나는 모국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셈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드러나는 재능의 한계에 절망했고, 설사 그 고비를 넘긴다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구멍은 없어 보였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나에게 점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보수적인 문화, 성공 지상주의, 제 탐욕만을 취하는 정치인 등
불만에 가득 차있던 나는 끊임없이 불평의 늪에 빠진 채로 주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튕겨져 나가듯 결심했다. 이런 환경을 벗어나, 살고 싶은 나라 그리고 음악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기로.

그렇게 위태로운 억하심정을 품고 떠돌다가 라틴 아메리카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나는 각종 사건사고에 부딪혔다.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가 비극에 공명하듯 나의 악운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흔히 열정과 낭만의 코드로만 소비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낯’을 조금 들춰볼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은 글감을 주고 삶의 내구력을 키워준 나의 악운에 감사하다.

테러리즘과 내전으로 피에 얼룩진 역사, 비참한 혁명의 말로, 매춘, 마약, 흉기가 난무하는 강력 범죄, 인종 차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가난, 국제 빈부 격차 등의 현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독자에겐

그저 무시무시한 단어의 나열이라 거리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이 세상의

한 대륙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압도적인 풍경을 지닌 우유니 소금사막이나 세계 7대 불가사의인

마추픽추에 다녀온 일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야생의 퓨마와 함께 정글을 산책한 모험 같은 이야기도 담겨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이 책에는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담지는 못했다.
즉, 그곳 사람에게도 비일상적이며 극적일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행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라틴 아메리카에 가면 코가 아닌 목이 베인다는 식으로 편견을 갖게 될 지 모르는 염려 때문이다.

아무쪼록,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겐 색다른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그리고 이미 그 땅을 밟고 왔으나 관광지 위주로 짧게 다녀온 분들에겐 보지 못했을 이면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남미에 평생 갈 일이 없다면?
다시금 관용을 잃어가는 시대인지라 조금 낡은 느낌의 단어가 돼버렸지만, 세계 시민의 마음으로,

인터넷으로는 접하기 힘든 날 것의 지구촌 이야기를 접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퓨마와 함께 정글을 걷다

리슈와 처음 만난 날


피델 카스트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 마르진 않았으나

날카롭게 움푹 들어간 볼에 수염이 가득했고, 강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색 별이 그려진 카키색 모자에

인민복을 입은 그는 피델처럼 말도 많았지만(피델은 유엔에서 269분 동안 연설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말투에선 일말의 근엄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 공원의 공동 책임자인 안드레스이다.

아직 수면에 침잠된 나의 언어중추는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아무렇게나 오가며

떠들어대는 주의사항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오히려 퓨마에게 말을 걸 땐 ‘우끼끼끼’ 하는 원숭이 소리 같은

동물의 언어를 써보라는 말을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숭이 소리를 내며 팔다리를 흔드는 한 성인 남성을

어떤 표정으로 쳐다봐야 할 지 몰라 외면하는 사이 프란츠가 안드레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만하면 됐다는 프란츠의 말을 들은 안드레스는 가방에서 코카잎(Coca, 코카인의 재료,

안데스 산지에서 나는 풀로 허기와 피로감 완화의 효과가 있다)이 든 봉지를 꺼내 우걱우걱 씹으며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따라 걷던 중 프란츠는 리슈가 좋아하는 풀을 뜯어가자고 했다. 퓨마가 풀을 좋아한다는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안쪽에 있는 풀의 털이 짧으니 더 낫다는 프란츠의 지시에 따라 풀을 꺾은 뒤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리슈와의 첫 만남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정글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수목은 전방위로 가지를 뻗어 연결돼 있었고 그 무질서함 속에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나무를 베어가며 만들었을 길이 나 있었다. 한없이 깔려있는 낙엽에는 벌레들이

갉아먹은 구멍으로 가득했다. 정글의 곤충은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식량 부족 문제는 겪지 않을 것 같다.

곳곳에 테이프가 붙어 있는데 노란색은 리슈가 있는 우리로 가는 방향이고 파란색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곳이었다.

몇 차례 시냇물을 건너고 나서야 왜 장화를 신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널찍한 한 시냇물에선

신비로운 무늬를 한 한 쌍의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동화 같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동원하지 않고는 묘사할 길이 없는 풍경이었으나 삐딱한 나의 두뇌는

유별나게 예쁜 건 나방이라는 한 자원봉사자의 말을 기억해냈다. 오르막길에 약한 나는 리슈의 산책로가

의외로 평 평한 것에 안심했으나 우리 직전의 길은 경사가 아주 급했다.


“올라, 리슈! 미 가띠또(Mi gatito: 내 야옹아)*.”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프란츠는 리슈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긴장한 상태로 어색하게 그 말을 따라 했다.

가뜩이나 심란하고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옆에 있던 안드레스가 원숭이 소리를 내기 시작해 정신까지 사나웠다.

커다란 철창 앞에 당도하자, 위압적인 기품을 지닌 커다란 생명체가 걸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프란츠가 내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며 앉더니 주먹만한 구멍에 손을 넣었다. 리슈는 그 손에 머리를 부비며

집고양이처럼 그릉그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초면에 손을 집어 넣은 나에게도 경계 없이

머리를 부벼대기 시작했다. 도도한 애완용 고양이보다 더한 친화력을 보여주는 맹수를 보니 왠지 딱한 마음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리슈는 까슬한 혀로 내 손을 핥기 시작했는데, 힘이 너무 억세 피부가 다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 밖의 친절한 환영에 보답하기 위해 꾹 참았다. 안드레스가 우리 왼편으로 향했다.

두 나무 사이로 길게 매달려 있는 로프에 D자형 카라비너가 달린 로프가 걸려있었다.

안드레스는 카라비너를 푼 뒤 한 쪽은 자신의 허리에 있는 카라비너에 연결했고, 나머지 로프를 둥글게 말아

팔에 걸었다. 이중으로 닫혀있는 첫 번째 철창문을 열고 들어가 닫고 두 번째 안쪽 문을 열자 리슈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고, 안드레스는 카라비너를 리슈의 목걸이에 연결했다. 프란츠가 바깥 문을 열자

리슈는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드디어 산책이 시작됐다.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리슈는 뛰기 시작했고, 안드레스는 재빨리 로프를 늘어뜨리며

그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아까 전의 시냇물을 지났다. 평지에 다다르자 리슈는 걷기 시작했고 안드레스는

다시 로프를 말았다. 프란츠는 안드레스가 하는 것처럼 평소엔 최대한 로프를 말아 퓨마 뒤에 바짝 붙어 걷고,

갑자기 뛸 때는 로프를 늘어뜨리는 게 산책의 기본이라고 했다. 그리고 로프를 리슈의 뒷다리 사이에 위치시켜야

리슈가 로프를 밟아 심술을 내는 일이 없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조금 더 가다가 안드레스는

허리의 카라비너를 풀고 프란츠에게 건넸다. 안드레스는 코카잎으로 물든 흉측한 입으로 주의사항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한층 더 정신 없는 말투였으나 내 몸을 휘감은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그의 말을 잘 쫓아가기 시작했다.

리슈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그르렁거리는 건 점프하겠다는 뜻이니 이름을 불러 진정시키라고 했다.

그리고 리슈가 자주 뛰어오르는 여러 장소도 알려줬는데, 주로 높은 곳이었다.

리슈가 그늘에 들어가 쉬기 시작하자 프란츠는 다가가 아까 뜯어 온 풀을 내밀었다.

신기하게도 이 육식 동물은 넙죽넙죽 그 풀을 받아먹었다. 나의 흥분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살짝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는 초심자다운 방심이었다. 휴식을 마친 리슈는 돌계단을 오르다 말고 돌아와 안드레스의

허벅다리를 물기 시작한 것이다. 안드레스는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남은 성한 다리를 뒤로 뻗어

중심을 잡고 서서 프란츠에게 손짓을 했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져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드레스는 간신히 신음 소리를 참아내고 있었고, 프란츠가 리슈를 달래자 그 강인한 턱에서 힘을 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드레스는 “방금 훌륭한 실전 교육을 했다.”고 내게 말해줬다. 동물들이 서로 엉겨 붙어

깨물며 놀듯이, 퓨마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과 놀고 싶어하나 인간은 이를 버틸 수 없으니 자기가 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같은 상황에 닥쳤을 때 지시대로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저 큰 몸집이 나에게 뛰어들었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허튼 망상이 이어지는 사이 우리는 다시 커다란 철창 앞에 도착했다. 리슈를 우리 뒤쪽으로 이끌어 그늘 아래서

쉬게 만든 뒤, 나무 사이의 로프에 카라비너를 연결했다. 그리곤 리슈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우리 앞까지 간 뒤, 프란츠가 하타타Jatata라는 커다란 잎사귀를 흔들며 리슈를 유인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슈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슈를 매단 6m의 로프가 최대로 펼쳐진 곳은 우리 일행 바로 앞이었고 난 맹렬히 뛰어오는

맹수의 모습에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돌아서는 리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안드레스는 리슈를 우리 안에 넣고 있었다. 이렇게 리슈와의 화끈한 신고식은 끝이 났다.


이 날 밤,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하나 둘 침대에 몸을 누이러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나와 내 또래인 스위스 친구 레토, 그리고 프란츠였다. 레토는 산책할 때 리슈가 점프하지 않았냐고 놀리듯이 내게 물었다.

나는 몇 시간 전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라 긴장한 채로 안드레스의 허벅지가 물린 얘기를 해주었다.

레토는 짓궂은 어조로 퓨마의 놀이상대 요청을 겪은 뒤 겁에 질려 이곳을 떠난 독일 남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프란츠가 그런 레토를 보며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한 여자는 리슈보다 훨씬 작은 새끼 퓨마를

애완용 고양이 대하듯 한 덕분에 퓨마가 그녀에게 매일 뛰어올랐다고.


“퓨마에게 필요한 건 애정이 아니고 존중이야.”

프란츠의 이 말은 인간을 위한 말인지 까다로운 고양이과 동물을 위한 말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복잡하네요. 마치 사랑같아요.”

내 말에 레토는 좋은 비유라며 공감했다. 우리의 대화는 각자의 모어가 아니었기에 문장에 여백이 많았다.
텅 빈 하늘에는 완전히 여문 달 만이 오롯이 떠있었다.


*가띠또는 고양이란 뜻의 gato를 조금 더 귀엽게 부르는 말이다. 스페인어에선 명사 끝에

–ito나 –ita를 붙여 좀 더 친근한 표현으로 쓴다.



책 『19금 남미』 본문 중에서.



저자 소개


신종협. Carlos
제주도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록 스타를 꿈꾸던 음악인이었다. 여행의 매력에 빠져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는 저자는, 대자연을 좋아하는 동시에 와이파이를 그리워한다.

오랜 여행의 시간 속에서 조금은 남다른 여행을 경험하게 되며, 이런 시간을 종종 글로 남기다가

남미에서 느낀 리얼한 여행기를 『19금 남미: 그 남자 그 여자의 진짜 여행기』에 담았다.


한가옥. Demian
여행 작가이자, 트라이벌 퓨전 밸리댄서인 그녀는 전생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춤을 추던 유목민이라 믿고 있다.

지금까지 30여 개국 이상의 나라를 여행하였고 문화체육관광부, 중국 산동성관광국, 트래블로, 싱글즈 등

다양한 곳에서 콘텐츠 PD 및 여행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바람 구두를 신다』, 『삼거리에서 만나요』, 『철부지 문래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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