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사 바로가기

디자인 토크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 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⑦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를 읽고 (해외배송 가능상품)품절

기본 정보
디자인 토크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 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⑦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를 읽고
수량수량증가수량감소

개인결제창을 통한 결제 시 네이버 마일리지 적립 및 사용이 가능합니다.

상품 옵션
옵션선택
상품 목록
상품명 상품수 가격
디자인 토크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 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⑦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를 읽고
수량증가 수량감소 0 (  )
total 0 (0)

이벤트

각박한 마음으로 갖는 반성의 시간

*

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⑦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를 읽고

김형진

 

2010년 12월호 <지콜론>에 최지안의 ‘디자인을 불편하게 하는 잣대’라는 글이 실렸다. 그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글로 쓴다.

 

그 글에서 필자 최지안이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의 잣대는 제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자’, ‘디자인도 삶의 한 부분이다’, ‘일하는 곳, 양태에 따라 디자이너(혹은 우리의 협력자)를 재단하지 말자’, 그리고 ‘어느 한 잣대로 디자이너를 평가하는 건 그릇된 계급의식이다’.

이렇게 요약해보자면 그 글엔 큰 문제가 없다. 선한 동기에 의해 쓰여진 착한 글이다. 이런 글에 시비를 거는 건 강퍅한 심보다. 그런 심보로 말을 걸어본다.

내가 그의 글에서 동의하는 지점은 우리는 서로 다른 잣대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디자인도 삶의 일부분이다 라는 데까지다.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그는 그 글에서 무한정의 상대주의와 이에 기반 한 상호 신뢰를 보여준다. 그리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잣대를 아무 곳에나 들이대지 말자고 한다. 그건 자칫 비뚤어진 ‘계급의식’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끌어다 서둘러 말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상대주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 선택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가 불편해하는 ‘계급의식’이라는 것은 싫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의 글을 조금 따라가 보자.

“디자이너로서 다른 디자이너나 학생들을 만나고 대화하다 보면 가끔 마주치게 되는 어떤 불편함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디자이너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의식 같은 것입니다. 어떤 특정 지역에 자리한 회사에서 일하면 그 사람은 좋은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 된다던가, 클라이언트를 두고 일 하는 디자이너를 조금은 한심하게 여긴다던가, 인쇄소의 김씨 아저씨는 디자이너인 나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던가, 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디자인은 모두 잘못된 디자인이라던가, 잡지에 실리지 않으면 뭔가 의미 있는 디자인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긴다던가, 인문학 책을 논하지 않으면 생각 없는 디자이너로 여긴다던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계급의식’이 얼마나 편향된 것인지 밝히기 위해 그는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가져온다. 가족을 위해 디자인하는 박씨, 전단지 디자이너 이씨, 무명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김씨,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는 장씨, 인쇄소 기장 신씨, 인하우스 디자이너 곽씨, 전시를 위해 작업하는 정씨, 그리고 철학자 이름과 인문학에 밝지 못한 최씨. (그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디자이너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이유도, 편향된 잣대로 인해 자신의 입장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디자인은 무언가 위대한 것이기 이전에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단서도 따라 붙는다. 만약 위에 등장한 사람이 엉망인 디자인을 한다면 그건 “그가 그 곳에 자리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선 그 자신이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건 얼핏 감동적이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수사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과 구멍이 많다. 그의 말대로 디자인이 삶의 문제라면 우리는 때로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부끄럽게’여길 줄 알아야 한다. 색깔 선택이 이상해서, 자간이 너무 좁아서, 레이아웃이 엉망이라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의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엉망인 디자인을 한다면 그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자리한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매번 점검해야 하지만, 동시에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 자리란 과연 어떤 곳인지 물어야 한다.

사실 ‘삶’이란 단어는 어마어마한 것이고, 어려운 것이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인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많은 논점을 통째로 집어 삼키곤 한다. 삶의 문제라는데 누가 감히 푸투라가 어떻고, 삼각형의 각도가 어떻고를 따지겠는가. 찌라시를 만들건, 애뉴얼 리포트를 만들건, 개인 작업을 하건 이 모든 것의 앞엔 그들 각각의 삶이 있을 테니까. 나를 포함해 많은 디자이너들은 때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말을 종종 입에 담는다. 여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건 촌스럽고, 졸렬한 짓거리가 된다. 디자인은 삶이라는 거대한 ‘무엇’ 앞에 너무나 미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 말라는 건 궤변이다. 반복해 얘기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내 얘기를 조금 해보자. 2009년 10월에 나는 서울디자인재단이 주관한 전시 행사의 리플릿 작업을 했다.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과 홍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인의 소개였고, 마침 스튜디오의 살림도 넉넉지 않아 거절하지 못했다. 일은 고역이었다. 담당 공무원과 아침저녁으로 다퉜다. 한글은 그렇다 치고 영문까지 서울시 지정 서체만 사용해야 한다는 지침을 받았을 땐 헛웃음만 나왔다. 아무튼 일은 끝났고 서울디자인재단은 나의 디자인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고 얼마 후 FF Seoul(www.ilikeseoul.org)을 둘러싼 작은 소동이 있었다. 난 부끄럽고, 창피했다. 제 직분에 충실하다는 건 절대 면책의 사유가 될 수 없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를 위해 일했다는 알량한 죄책감이 내 마음을 계속 긁어대기 때문이다.

최지안씨의 글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느냐에 대해 말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드느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디자이너 개인의 분발을 촉구하지만, 그 디자인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라고 말하진 않는다. 삶에 충실하라고 말하지만 그 삶이란 게 꽤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삶이 다층적인 이유는 그 안에 ‘가치’라는 것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때때로 편협한 외눈박이의 시야를 가지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내팽겨쳐서는 안 된다. 서로의 가치들이 충돌하고, 쟁투하는 것을 말려서는 안 된다. 상대주의라는 속 편한 자세로 모든걸 용인하고 아량을 보여선 안 된다. 상대주의가 압도하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건 ‘기성’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의 글이 불편하다.

물론 최지안씨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충실하기만 하다면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자리나 활동에서 비껴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재단하거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진 말자는 것일 테다. 찌라시나 만든다고, 회사의 지시에만 따라야 한다고, 남들처럼 철학자 이름을 주워섬기지 못한다고 서로를 폄하하며 쓸모 없는 힘을 낭비하진 말자는 것일 테다. 이런 그의 진심을 오해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디자인계의 ‘계급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앞서 그가 애정을 가지고 열거한 디자이너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대신 반성의 자세를 요구했으면 한다. ‘박씨’는 가족을 위한다는 게 절대로 면책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마피아들도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가족 사랑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장씨’는 자신이 상대하는 클라이언트가 혹여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자신의 지갑을 열면서 상대방의 눈과 입은 감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인하우스 디자이너 ‘곽씨’는 자신이 디자인 업무 대신 하청업체 디자인 관리에만 열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최씨’는 반지성주의에 취해 도리어 인문학과 교양에 열중하는 디자이너들을 잘난 체한다고 무시하진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무한한 신뢰와 상호 격려가 아닌 조금 더 각박한 마음과 반성의 시간이다.

디자인 잡지에 실리는, 블로그에 떠 있는 썸네일 이미지로만 보면 디자인의 세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네모난 이미지 속에선 장씨도, 최씨도, 김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색상과 형태, 레이아웃만 도드라지는 썸네일 이미지 속에서 디자인은 단지 호사스런 시각적 쾌감만을 제공한다. 그 호사스러움 속엔 다툼도 없고, 편 가르기도, 시기심도, 열등감도 없다. 그건 지극히 안전한 세계다. 하지만 이 안전함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반성 없이, 윤리 없이 즐긴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그 작은 사각형만큼의 삶뿐이다.

 

* 다음 호에서 김형진 필자의 글에 대해 느끼는 ‘디자인 읽기’의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

김형진

워크룸 디자이너

 

 

 

 

review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

Q & A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

shipping, exchange, return guide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상품은 입금 확인후 배송해 드립니다. 다만, 상품종류에 따라서 상품의 배송이 다소 지연될 수 있습니다.

교환 및 반품이 가능한 경우
- 상품을 공급 받으신 날로부터 7일이내

  단, 포장을 개봉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가치가 상실된 경우에는 교환/반품이 불가능합니다.
- 공급받으신 상품 및 용역의 내용이 표시.광고 내용과
 다르거나 다르게 이행된 경우에는 공급받은 날로부터 3월이내, 그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0일이내

교환 및 반품이 불가능한 경우
- 고객님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등이 멸실 또는 훼손된 경우.

   단, 상품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는 제외
- 포장을 개봉하였거나 포장이 훼손되어 상품가치가 상실된 경우
- 고객님의 사용 또는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하여 재판매가 곤란할 정도로 상품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복제가 가능한 상품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자세한 내용은 고객만족센터 1:1 E-MAIL상담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고객님의 마음이 바뀌어 교환, 반품을 하실 경우 상품반송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