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사사로운 디자인사 / 김형진

Special Feature

사사로운 디자인사

34인의 크리에이터들이 꼽은

남겨진 것 / 남겨 주고 싶은 것 / 변하지 않을 것

김형진 / 강진 / 김지원 / 오상택 / 김수랑 / 김기조 / 허유 / 구본호 / 강병융 / 권준호 / 권민호 / 이광호 / 블랭크에이 / 김혜림 / 박영택 / 이우진 / 윤수정 / 나난 / 민택기 / 김태희 / 윤여경 / 최지웅 / 조은하 / 유혜인 / 아메바피쉬 / 윤예지 / 임진아 / 이봉수 / 박창용 / 정수현 / 정규혁 / 황형신 / 현광훈 / 노동균

흔히 시간은 사물을 통해 증거 된다. 박물관의 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대를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는 사소하더라도 그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주는 귀중한 ‘무엇’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지는 않는 이유로 그 사물은 영영 시간 속에 사라질 뿐.

이번 <지콜론>의 4주년 창간기념호에서는, 사소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개인의 시간을 기념하고 기록해보고자 한다. 34인의 크리에이터들에게 각각 과거로부터 남겨진 것, 현재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 (아마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물었다. 그들이 꼽아낸 ‘것’들은 역시나 개인적이고 사사롭다. 하지만 그것들의 집합은, 지금 이 시대의 디자인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가치를 새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일상 속 소중한 ‘디자인 이야기’를.

기획 및 진행 <지콜론> 편집부

디자인 나은민, 강혜정

사진 스튜디오 S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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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

에디터 이상현

김형진

서울에서 가장 명민한 디자인 스튜디오 중 하나인 ‘워크룸’의 공동 대표. 전시 및 책 관련 디자인은 물론 ‘카페 잇’, ‘mk2’ 등 공간에서도 흥미로운 그래픽 작업을 보여줬다.

남겨진 것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이 책이 출간된 1993년,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입학식 직전,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했고, 6개월 뒤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저축할 돈이 없던 나와 내 친구들은 TV에서 서태지를 보았다. 커피는 주로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마셨지만, 강남 사는 친구들을 만날 때는 압구정동 ‘보디가드’에 갔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행인들이 통창 너머 나를 흘끔대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1993년,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현실문화연구에선 이 책을 냈고, 늙은 기자들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오렌지족과 X세대에 대한 기사를 썼다. 벌써 오래된 얘기다.

난 이 책이 맘에 들었다. 표지의 색깔도 좋았고, 서태지도 좋았고, 밑도 끝도 없이 낭만적이기만 한 제목도 좋았다. 책날개가 없는 것도 좋았고, (68년의 파리를 본딴 게 분명한) 선언투의 문장들도 좋았고, 자기 세대에 대한 어리석은 낙관도 좋았다. 서초동 금호아파트 지하에 있던 ‘현실문화연구’ 사무실을 찾아 간 것도 그래서였다. 도대체 이런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새침한 댄디들일지, 넝마를 입은 과격분자들일지, 아니면 따분한 책상물림들일지 궁금했다.

그날 만남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하로 내려갈 때도 낮이었는데,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도 여전히 밖은 밝았다. 나는 약간 흥분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도 같다. 그 사람들은 책이라는 걸 만들고 있었다. 그건 지금 막 내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다. 버스에 치어 죽은 김수영이 아니고, 행복하게 책을 읽다 죽은 김현이 아니고, 연재소설을 쓰다 도망쳐버린 김승옥이 아니고 그들이, 내 동시대인들이 ‘현실’의 ‘문화’에 대해 책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멋진 발견이었다. (내게) 책이란 지금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닌 이전 세대가 만들어 내게 전해준 것이었다. 책은 전 세대의 유언이고, 유산이었다. 상속세를 지불하지 않고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것들만이 (내게) 책이었다. 그런데 1993년 어느 날 낮, 서초동의 아파트 지하에 몰려 앉은 치들이 책을 만들고 있었고 난 그걸 보았다. 그들은 내게 채무자가 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채권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혹은 금치산을 선고당했기 때문에. 그들을, 이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했으리라. 나도 책을 만들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책이란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생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꽤 그럴듯한 일이라는 것을.

남겨 주고 싶은 것

가가린

작업 중에선 남기고 싶은 것이 없다. 속이 뻔히 보이는 겸손이 아니라 진짜다. 작업을 보는 내 눈은 마치 싫증 잘 내는 애인의 그것을 닮았다. 한달 전, 일주일 전에 막 끝마친 것들은 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일년 쯤 후면 그 역시 시들해질거다. 가가린(Gagarin)은 내 사무실과 같은 길가에 있는 작은 책방이다. 내 동료들과 갤러리 팩토리, 카페 mk2, 그리고 건축가 서승모가 모여 쑥덕거리다 이 곳을 함께 만들었다. 2008년 6월이었다. 가가린이 문을 열던 날 저녁이 생각난다. 그날 워크룸에선 김학량 선생이 기획한 전시가 열렸고, 팩토리에선 디자이너 최병일의 전시가 오픈했다. 우리의 친구들, 팩토리, mk2의 친구들이 창성동의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차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고 천천히 달렸고 우리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초여름 저녁의 습기를 즐겼다. 가가린은 회원들이 자기들의 책을 내다 파는 위탁 헌책방이다. 디자인, 미술, 사진, 건축 책들이 많지만 만화책과 잡동사니들도 가득하다. 누구나 탐낼 책들도 있지만 폐지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것들도 수북하다. 언젠가부터는 셀프 퍼블리싱을 하는 젊은 친구들이 책을 가져다 놓기 시작해 가장 좋은 매대를 차지했다. 기타리스트였던 점원 덕분에 저녁 시간엔 늘 기타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점원이 그만 둔 것이 내내 아쉽다. 사랑처럼, 가가린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아니, 망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책 살 돈은 늘 부족하니까. 휴대폰 요금도 내야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애플의 신제품도 사야 하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비정규직 말고는 일자리가 없는 젊은 세대에게 책은 그리 절실한 구매품이 아니다. 늙은 이보다는 젊은 이들에게 기대야 하는 가가린의 앞날은, 그래서 밝지 않다. 그래도 분명히 다른 어딘가에서 또 다른 책방이 만들어질테니 걱정은 없다. 그 책방 또한 가가린처럼 좁고 가난할 테고,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망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뒤를 이을 (가난한) 젊은 친구들은 분명 또 있을테니까. 그들이 가가린을, 그리고 아직 이름 지어지지 않은 가가린의 친구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자기들처럼 가난했고, 낙관적이었던 이 공간들.

변하지 않을 것

슬기와 민의 작업들

슬기와 민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한국 그래픽 디자인을 들어올려 이전과는 다른 공간에 내려놓았다. 위치가 변하자 지형 또한 변했고, 이전에 땅 주인 행세를 했던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기거했던 번지수를 찾느라 분주했다. 신난 건 젊은 세대였다. 가진 것이 없던 그들은 마치 신대륙에 막 도착한 탐험가들처럼 슬기와 민이 열어 놓은 낯선 풍경을 즐겼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십 몇 년전의 안상수를 떠올린다. 그 또한 땅을 한번 들었다 놨다. 자리를 바꾼 땅에선 새로운 식물과 동물들이 자라났다. 그들이 자라나 숲을 이루었고, 마을을 만들었다. 숲은 숨 쉴 공기를 만들어 주었고, 마을에선 자라나는 세대들이 교육을 받았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슬기와 민이 옮겨 놓은 땅에선 어떤 식물이 자라날까. 어떤 배치를 지닌 마을이 꾸며질까. 그곳에 광장은 있을까. 햇살은 충분할까. 아직 모른다. 슬기와 민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잡초처럼 보인다고 함부로 뽑지 말자. 돌연변이처럼 보인다고 추방하지도 말자. 아직, 그 누구도 모른다. 동시대 한 켠에 앉아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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