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사사로운 디자인사 / 이봉수, 박창용

이봉수

이봉수 비트볼 레코드의 대표. 국내외 숨겨진 명반을 복원, 재발매하며 리이슈 레이블로 성장시켰다. 더불어 국내 신진 뮤지션을 발굴, 소개하며 홍대 앞의 튼튼한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남겨진 것_ 코닥 8mm 인스터매틱 홈무비 카메라

1985년,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초교 동창 김학준의 집에 놀러 갈 기회를 얻었다. 친구 사이에 뭔 기회냐고?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나이키 오리지널 운동화를 허구한날 바꿔 신던, 은평구 응암-녹번동 일대의 패션 리더라 할 친구였기에 전교 여학우 아니 또래 모두의 선망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망의 마음도 잠시, 나이키 오리지널로 몸을 치장하던 학준이의 패션과 그의 - 분명 부모님 소유의 - 오래된 한옥 집이 빚어내는 묘한 언밸런스를 경험하곤 그 느낌은 괴담의 삽화 같은 이미지로 각인이 되었다. 그에 더한 이미지 충돌의 연속이 있었으니! 사랑채 역할을 하던 학준의 방에서 보게 된 타임 라이프의 단행본과 여기 소개하는 코닥 홈무비 카메라였던 것이다. 학준이의 - 정확히는 부모님 소유일 - ‘코닥 8미리 인스터매틱 홈무비 카메라’는 당시 영화의 매력에 빠져있던 나와 주변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으며 약간의 무리수(<Rockin’ with Seka>를 혼자 볼 수 있게 해주는 관람권의 거래)를 둔 끝에 한 편의 단편을 제작하고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내 손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래 소년들의 꿈이란 그렇듯 우리는 한 달 용돈보다 비싼 카트리지 필름과 그 인화비 이후 편집과 영사기를 통한 상영까지, 카메라 제조공정보다 더 복잡할 것만 같은 과정에 지레 겁을 먹고 제작을 포기하고 만다. 그래도 기분은 내고 싶었던지 우린 학준의 거듭되는 반환요구도 불구하고 카메라 모터 도는 소리를 배경으로 한 페이크 촬영으로 기분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코닥 8미리 홈무비 카메라는 어설픈 ‘중딩’ 영화광들의 벗으로 몇 년의 시간을 함께 했다. 이후 페이크 촬영 놀이는 끊고 기본 기능만 지닌 채 저렴한 보급용으로 제작된 투박한 그 놈의 외양이나 매뉴얼, 패키지 디자인을 보며 빈티지스러움을 애호하는 취향의 허세도 떨어보지만….

남겨 주고 싶은 것_ 비트볼의 음반들

업자라면 당연히 안 팔리면 어쩌나 하는 현실적인 고민도 하지만 상품이기 이전에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뮤지션들의 기록을 만드는데 협력하고 아카이빙한다라는 생각을 하면 비트볼에서 발매한 모든 음반이 나의 소중한 기록물들이자 작품들이라 하겠다. 뭐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한 장의 음반엔 기획부터 녹음, 믹스, 마스터링, 디자인, 홍보물 제작까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여러 인원이 참여한다. 그 비용의 많고 적음을 제외하곤 홈레코딩이라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 안에서 음악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성장하는 인물도 있을 것이고 그 작업 하나를 유일작으로 남기고 업계를 떠나는 인물도 있을 것이다. 신(혹은 업계)을 이루는 그런 개개인의 개성과 작업물을(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존중하려 노력하는 것이 내 요즘의 ‘인간수업’ 주요 내용 중 하나이다. 나는 거의 모든 비트볼의 음반을 제작하는데 있어 조력자이며 관찰자였고 가끔은 디렉터였으며 심지어는 삽화가의 역할까지 경험했었다. 그렇기에 판매고와는 별개(!)로 비트볼의 모든 음반들에 서린 여러 사람의 애정과 원한, 뒷얘기 따위를 죄다 알고 있으니 그 음반들 모두 소중하다 말할 수 있겠다. 현재의 비트볼이 과거 유산의 재발매에도 열심인 것처럼 지금 여기를 살아간 뮤지션들의 작품들도 미래의 누군가에 의해서 발굴되고 재평가되겠지? 그때가 오기까지 보존자로서의 역할을 비트볼이 하는 것이겠고. 이런 연유로 누구누구의 음반으로만 불리는 것 보담 ‘비트볼의 작품’으로도 기억되는 것이 내 개인의 사심이라면 사심이겠다. 성불하지 못한 비트볼의 모든 음반도 나는 자랑스럽다.

변하지 않을 것_ 블루노트 LP 커버

버브나 판타지 계열의 재즈 음반도 좋은 디자인이 많지만,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에 무지한 나도 그냥 한 눈에 보기에 멋스러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아트워크 군을 형성하고 있는 게 블루노트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 공동 창업자이자 사진가였던 프랜시스 볼프(Francis Wolff)와 디자이너 라이드 마일즈(Reid Miles)가 있었다는 뻔한 이야기는 위키디피아를 찾아보면 죄다 나올 것이고. 아주 단순한 디자인-뮤지션의 사진과 몇 줄의 타이포그래피-으로 음반을 처음 접했을 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건 물론 그 내용물의 성격과 대체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허비 행콕, 래리 영, 조 헨더슨, 케니 버렐, 리 모건 등의 음반을 상기해보라. (개인적으로는 60년대의 4000번 시리즈 대부분, 그 중 루 도날드슨Lou Donaldson, 쓰리 사운드the 3 Sounds, 도날드 버드Donald Byrd의 아가씨 커버시리즈를 꼽겠다.) 무엇보다 그 형식이 좋은 사례로서의 전범이 되어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수없이 많은 뮤지션과 디자이너에 의해 재연, 재탄생 되고 있으니 이것이 가치 있고 생명력 있는 디자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단순하게 얘기해서, 재즈 컬렉터가 아니더라도 재발매 LP한 장 사서 자신의 거실이나 작업실에 걸어 놓고픈 그런 커버가 블루노트 아니던가!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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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용

박창용 비디오, 웹 등 전반을 다루는 그래픽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브랜드 송자인, 송지오의 아트디렉팅 등 감각적인 패션 그래픽을 선보여 왔다.

 

남겨진 것_ 친구

혼다를 처음 만난 건 2001년 바르셀로나였다. 21살의 그도 나도 배낭여행 중이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그리고 무엇보다 타국 땅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도와주게 되었다. 그 짧은 만남 이후에도 서로 연락을 나누며 서울과 동경을 오가는 교류를 이어왔다. 2008년 1월 다시 동경을 찾았을 때 그는 센다이의 도호쿠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그는 나를 센다이로 초대했고, 나는 불평했다. ‘센다이가 어디야? 교토도 오사카도 아니고 얘는 하필 센다이에 있는 거야?’ 센다이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혼다는 21살의 작은 도움을 온 마음으로 보답하겠다는 듯 가이드를 자청했다. 1주일 정도 센다이에 머물렀다. 새해맞이 마쯔리, 센다이의 명물이라는 ‘소 혀’구이, 고즈넉한 해변가의 평범한 스시집… 그리고 그때 혼다는 도호쿠 대학에 더 머물지, 대기업에 취업을 할 지 고민했다.

2011년 3월 11일, 뉴스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해마다 일본을 방문했지만 가 본 곳이라고는 동경과 센다이가 전부인 나에겐 그야말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 서로 나이가 들어 메일도, 연락도 뜸했지만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혼다가 걱정된다.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기 위해 애쓴다. 어떤 이유로든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가 있다. 누군가를 이유없이 증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뻔한 말을 항상 되새긴다. 모든 인연이 소중하고 모든 인연이 나를 ‘정의’한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국경을 초월한 우정. 부모님 친구분들의 자녀, 그 자녀들의 친구들, 친구들의 친구들, 우연히 주고받은 메일, 설레이는 여행길에서의 만남… 이성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진 모든 친구들이 ‘사람’ 박창용에게, 그리고 ‘디자이너’ 박창용에게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감상적일지 모르지만 이 모든 인연과 우연, 작은 감정의 조각들과 추억이 모여 내가 되고 나의 디자인이 된다고 믿는다. 모든 친구들의 행복과 건강을 빌며… 특히 이 지면을 빌려 내 소중한 친구 혼다 타이조의 안부를 묻는다.

남겨 주고 싶은 것_ 데북 디자인, 송지오 아트디렉팅

누군가에게 유산처럼 물려줄 수 있는 디자인으로 꼽는다면 일의 크고 작음, 작업 자체의 중요함 또는 영향력과는 상관없이 디자인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눈물과 기쁨과 애정이 담겨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사적인 기준에 따라 고른 몇 가지 작업물은 정말 누구에게 함부로 나눠주지도 않은 채 박스 안에 소중하게 담겨있다.

2003년 ‘램(lamb)’을 운영하는 친구이자 동료였던 허유와 함께 만들었던 노트 연작–디자이너라면 한번쯤 겁 없이 도전해볼 법한 사업 아이템 가운데 하나인 ‘스테이셔너리’. 노트 브랜드 ‘데북’의 런칭은 길고도 험난했다. 햇병아리 디자이너였던 나를 믿고 덜컥 임무를 맡긴 허유도, 제대로 인쇄 한번 해본 적 없던 나도 처음엔 이 정도의 고행인 줄 몰랐다. 사무실로 임대한 한옥에서 몇날 며칠을 밤새우고 초조한 인쇄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끝나지 않을 동굴 같았다. 나로썬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처음 맛본 끝없는 철야의 쓴맛. 하지만 그 쓴맛의 뒤에 ‘내 새끼’처럼 안기는 실물을 목격하는 환희의 경험은 결코 잊을 수 없다.

2006년부터 패션 브랜드 ‘송지오’의 파리 진출을 도왔던 기억–처음에 ‘파리’라는 단어만 듣고도 날 듯이 기뻤다. 파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더불어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파리 현장에 직접 투입된다니! 하지만 부푼 기대는 공항에서부터 고단한 현실로 급선회했다.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리에 도착해서는 모델들을 캐스팅하거나 피팅을 돕는 등의 잡무에도 동원되었다. 하지만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외에 진출해 고군분투하는 디자이너를 돕는다는 사실은 뿌듯했고 화려한 줄로만 알았던 패션의 백스테이지를 경험하는 것은 고달프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파리의 패션오피스를 안팎으로 넘나들며 활약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은 보너스. 나는 이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경험을 통해 컴퓨터 앞에서 박제가 될 법한 그래픽 디자이너의 숙명을 벗어 던졌고, 더 넓게 열린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다.

변하지 않을 것_ 파비언 배런의 디자인

파비언 배런을 언급하는 것은 뻔한 답일지도 모른다. 그래픽과 패션의 경계를 조금이라도 넘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외쳤을 이름이니까. 또 혹자는 그에게서 더 이상의 창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때론 그를 ‘돈독 오른’ 노인네쯤으로 폄하하기까지 한다. 2011년 그를 호명하는 것은 분명 식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현대 그래픽 디자인, 특히 패션과 그래픽의 경계를 지우고 오늘날 패션산업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그래픽 디자인의 외형을 그려나간 인물로 그를 꼽는 것을 주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더불어 그는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와 같은 선구자들의 유산을 현실적으로 계승했던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지휘를 거쳐 완성된 캘빈클라인(Calvin Klien)의 광고들과 향수병, 90년대의 주옥 같은 <하퍼스 바자(Haper’s BAZAAR)>, 나르스(NARS)의 패키지, 마돈나의 <섹스> 등은 길이 보전될만하다.

그러니까 그의 디자인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탄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산업이 또다른 산업과 만나는 시너지. 산업이 곧 영혼을 대변하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디자인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이 차가운 대중에게, 산업에게 전이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가 뻗은 줄기를 타고 페트로니오가 M/M이 태어날 수 있었고 <판타스틱맨>같은 잡지가 꽃필 수 있었다. 그가 디자인하고 다듬은 로고, 광고, 향수병, 잡지 덕분에 패션이 진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고 동시에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이 새로운 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며 독자적이면서도 원활하게 소통되는 언어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디자인은 16살의 소년이었던 나에게 ‘꿈’의 다른 이름이었다. 에디터_ 이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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