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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Words

 

More than Words

어느 소설가가 백지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림을 배웠더니 흰 캔버스가 주는 공포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내용의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글도, 그림도 우리 머릿속 혹은 가슴 속 무형의 무언가가 백지에 실체로 가 닿은 것이다. 여기서는 문인과 아티스트가, 또는 문인이 남긴 영감과 살아 있는 아티스트가 어떻게 사랑을 나누고, 교류하고, 서로 협력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캔버스부터 책과 영화,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매체와 결과물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권태기도 없이 지속된 텍스트와 이미지 간의 길고 긴 연애, 그 오랜 역사의 흔적들로 포문을 연다.

 

 

<정신병>

고원, 변지훈

구체시인 고원과 미디어 아티스트 변지훈의 협업 작품이다. 원작인 고원의 구체시 <정신병>이 가지고 있는 개념에 변지훈이 인터랙션의 성격을 부여하여 미디어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글자 ‘정’과 ‘신’은 관객이 입으로 부는 바람에 의해 ‘병’에 담긴다. ‘정’과 ‘신’이 담기는 ‘병’은 형태적으로 사물을 담는 ‘병’이지만, 그 속에 ‘정신’을 담음으로써 ‘병’은 ‘정신’과 결합하여 ‘정신병’이 되고 만다.

 

<정신병>

PC, Projector, Bottle, Microphone(2008)

테이블 위에 놓인 호리병에 관객이 숨을 불어넣으면, 스크린에 있는 병의 입구로부터 글자들이 나온다. 인터랙션은 숨의 세기와 길이에도 반응한다.

 

 

<Written on the Body>

늘 궁금하다. 작가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영감, 심상이란 것들은 어떻게 해서 텍스트로 변환되어지는지. 또 그 텍스트들은 어떻게 그것을 읽는 사람 각자의 머릿속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비밀스럽기까지한 경험에 의해 각색되어지고 인식되어지는지. 그토록 구미를 당기는 과정으로 탄생한 독립영화 <Written on the Body>를 소개한다. 영국 소설가 지넷 윈터슨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육체에 새겨지다』를 각색한 이 작품은, 감독 ‘원’이, 텍스트로 표현되고 있는 작가의 의도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해한 텍스트는 무엇이고 그려낸 이미지는 무엇일까. 현재 미국 유학 중인 원 감독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나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5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2009년에 완성된 <Written on the Body>가 나의 다섯 번째 영화다. 5편의 영화들 모두 국내외의 여러 영화제들에서 상영되어 관객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Written on the Body>는 ‘서울 국제 실험영화 페스티벌’에서 ‘Avid Award’를,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벌’에서는 ‘최고구애상’을 수상했다. 2003년 대안학교인 하자작업장학교를 졸업한 이후 독립영화협의회 16mm 필름 제작 워크숍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최하는 아시아 필름 아카데미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했고, 현재는 미국 뉴욕에 위치한 The New School에서 영화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몇 주 전, 나의 6번째 단편영화가 될 <Hi, Nakine!>의 촬영을 뉴욕에서 마쳤고 현재 후반작업 중이다.

<Written on the Body>는 지넷 윈터슨의 『육체에 새겨지다』를 각색한 영화다. 문학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무엇인가. 『육체에 새겨지다』 텍스트에서 당신이 떠올렸던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가 궁금하다.

원작 소설 중에 이런 문구들이 있다. “넌 언제나 사랑이 이런 식으로 매일매일 계속 되길 바라지, 그렇지? 그늘에서조차도 30도를 오르내리는 그런 식의 강렬함, 열기, 톱니바퀴처럼 몸을 파고드는 햇살. 네가 호주 출신이기 때문에 그럴까?”, “그녀는 현대적인 여성이라기보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주인공에 걸맞았다. 그녀는 고딕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한 가정의 주부임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자기 집에 불을 지른 채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도망칠 수 있는 성격이었다.”, “너의 머리카락은, 붉게 타오르는 그 머리카락은 네 우윳빛 살결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에게 이러한 묘사들은 젊은 시절의 니콜 키드먼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니콜 키드먼은 금발머리에 성형수술의 자잘한 흔적들을 보여주는, 좀 더 헐리우드 주민 같은 모습이지만, 영화 <Far and Away>(1992)에 출연하던 당시만 해도 “붉은 머리카락을 우윳빛 살결 위로 늘어뜨린” 호주 섬처녀의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게다가 니콜 키드먼은 40여 편에 이르는 다양한 영화들에 출연했고 그 대부분의 영화들이 한국에 수입되어 쉽게 영화 클립들을 구할 수 있었다. 각각 다른 영화들에서 각각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니콜 키드먼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어붙여 원작소설 속의 그녀, 루이즈로 만드는 건 나한테도 무척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작품 설명 중에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진부한 설정이 아니라) 진부한 표현들이다”라는 원작 소설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원작 소설은 문학적 야심이 매우 크고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작품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진부한 표현들이다”는, 원작 소설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문장으로, 작가의 의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주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넷 윈터슨은 소설 속에서 세상에서 제일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부녀인 루이즈와 사랑에 빠진 화자가 어느날 그녀가 불치병–그것도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의사인 루이즈의 남편에게 그녀를 맡긴 채 힘들게 어딘가로 떠났다가 결국 재회한다는 내용이니까. 도입부만 읽어도 끝이 예상되는 흔한 이야기라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다. 화자의 성별을 고의적으로 알 수 없게 만든 점, 전문 의학 용어를 사랑의 시로 바꾸어 표현하는 점 등이 작가의 야심을 실현시키는 도구들이고. 이런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다고 할 때, 줄거리를 충실히 표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뻔한 줄거리를 어떻게 하면 새롭게 풀어낼 것인가?’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Written on the Body>를 만들던 당시의 나에게도 가장 큰 숙제였다. 니콜 키드먼의 출연작들을 재편집하기,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 감독의 작업실 풍경을 드러내기 등은 저 질문에 대한 내 대답들을 표현하는 도구들이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묻고싶다. 또한 이후 <Written on the Body> 같이 문학 작품을 모티프로 한 영화 작업을 또 기획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Written on the Body>를 만들기 전, 한강의 단편소설 『아홉 개의 이야기』를 각색한 단편영화를 만들었었다.(아홉 개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곳 : youefo.com/film/818) 한강의 원작 소설은 아홉 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아홉 개의 “순간들”에 대한 묘사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목적은 이 순간들을 영화의 언어로 다시 묘사해보는 것이었고. 소설을 각색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시도하는 작업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 텍스트로 표현된 인물들, 상황들, 느낌들, 이야기들을 영화의 언어로 바꾸어 보여주는 것. 반면 <Written on the Body>에서 나는 텍스트로 표현되고 있는 작가의 의도 그 자체를 영화화하려고 했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번역했다기보다는 텍스트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흔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를 조금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난 나의 영화 <Written on the Body>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설명들을 듣지 않아도 그 자체로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원의 CV 페이지 : pinkmaker.egloos.com/2300339

<Written on the Body> 영화소개 페이지 : pinkmaker.egloos.com/2315946

<Written on the Body>를 볼 수 있는 곳 : youefo.com/film/817

 

 

『가슴에 달린 서랍 - 김영태의 글씨』

정신영

故 김영태 시인은 시와 산문, 그림, 무용과 연극계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인이다. <민음시인선> 표지의 캐리커처를 그린 작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북아티스트 정신영은 그의 시적이고도 자유로운 글씨들을 모아 ‘서랍’을 만들었다. 시인은 손으로 글씨를 쓰고 디자이너는 손으로 책을 만들었다. 책의 조용함으로 글씨의 힘이 살아나는 책, 『가슴에 달린 서랍』이다.

『가슴에 달린 서랍 - 김영태의 글씨』는 어떻게 시작된 작업인가

2006년, 출판사 부설 디자인 회사인 디자인 Y에서 시간제로 근무할 때로 기억한다. 육필 시집을 기획, 진행하고 있던 때라 시인들로부터 육필 원고를 받고 있었다. 김영태 시인에게 육필 원고를 받으러 갔던 분이 원고뿐만 아니라 공연 포스터나 팜플릿에 써준 시인의 글씨들까지 가져왔다. 어린아이 같은 동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힘차게 구불거리는 기상이 전해지기도 하는 그 글씨들을 책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김영태 시인의 글씨는 대학생 시절에 즐겨 읽었던 몇 권의 책을 통해서 이미 익숙한 터였다. 눈에 익은 독특한 글씨가 반가웠고,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즐겨 읽던 시인의 글씨라는 사실 또한 반가웠다. (김영태 시인의 시집과 수필집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김영태 선생님은 무용, 연극인들과의 교감이 남달랐기 때문에 공연을 위해 제작된 포스터나 팜플릿의 제목으로 써준 글씨들이 대다수였다. 시인의 손 글씨를 최대한 부각시켜 일종의 서예집이나 화집처럼 만들겠다는 콘셉트를 정했다.

작업 과정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

먼저 기존의 인쇄물에서 김영태 시인의 글씨만을 추출했다. 목적이 있는 인쇄물에 들어가 있는 글씨는 정보 전달의 측면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글씨 자체가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다. 더불어 글씨 자체가 그림처럼 보여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최대한 인쇄 글씨를 배제하기로 하고, 글씨들을 가급적 자유롭고 시원스럽게 보이도록 지면 위에 배열했다. 여기에 더해 김영태 시인에게 각 제목 글씨(제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손 글씨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책은 맨 뒤 페이지의 판권과 페이지 번호, 부제 ‘김영태의 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인이 직접 쓴 손 글씨로 구성되어 있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김영태 시인의 버리기 아까운 그림들 24컷을 글씨와 함께 중간 중간 색지를 이용하여 넣고, 이 책을 만들 당시의사진 몇 컷을 뒤에 넣어 완성했다.

초판 부수가 15권이었다고 알고 있다

처음 출판사에서 기획했을 때는 15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쇄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수량(200~300부)이었다. 그러나 화집이나 서예집, 아티스트북 판매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장 상황에서 경제적 타당성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책을 기다리고 계신 김영태 시인에게 아티스트북 형태로 15권을 만들어 드리자고 제안을 했다. 15권이라는 수량은 인쇄소에 맡길 수 있는 물량이 아니었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복사를 이용하는 방법이었고, 그로 인해 절감된 인쇄비를 종이에 투자했다. 다양한 종이로 충분한 실험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종이를 선택했고, 수작업으로만 가능한, 중간 중간에 색지를 끼워 넣는 편집을 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세심하게 직접 추려서 15권을 만들었고, 책을 담는 박스도 직접 제단하고 접어서 만들었다.

협업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협업의 매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책을 받아 든 김영태 시인의 만족도 불만족도 아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책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어하셨는데, 수량이 적은 관계로 마음을 전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에 김영태 시인은 암투병 중이셨는데도 기꺼이 기억을 더듬으며 제목 글씨에 설명을 직접 써 주시는 열의를 보여주셨는데 흡족한 수량을 만들어 드리지 못한 점이 가장 안타깝다. 결국은 이 책이 김영태 시인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 김종삼 시인, 그리고 자신의 캐리커처를 담은 본문 마지막 페이지의 제목 글씨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두 선배는 가고 고장난 배가 하나 물가에 떠돈다.” 특별히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이 글귀가 진한 쓸쓸함으로 아직도 여운을 남긴다.

협업의 매력은 교감이었다. 책을 만들기 위해 김영태 시인의 혜화동 작업실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엄청나게 쌓여 있는 책 더미 속에 앉아 작고 벌어진 붓으로 글씨를 쓰시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았었다. 낭만주의자의 아련한 기억 속이야기들을 듣기도 했었다. 김영태 시인의 시간 속에는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있던 내 청춘의 시간도 함께 있었다.

 

정신영

북 아티스트이자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 한세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어지는 기사는 <지콜론> 1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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