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낭만주의자의 사회-시대가 남긴 낭만

낭만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혹은 현실 너머에서 이상과 낭만을 쫓는 낭만주의자들(곧이어 소개될 여섯 명의 역사적인 인물들 같은)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그러한 세상이 곧 오늘의 현실이고, 고로, 낭만은 결국 지극히 현실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낭만과 아름다움은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주제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너무나 주관적이다. 장미꽃 한 송이보다 자장면 한 그릇을 선택할 이들이 많은 사회에선, 장미보다 자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낭만이 될 수도 있다. 10명의 누군가에게 낭만을 묻는다면 100개의 낭만에 대한 정의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콜론>은 낭만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어떤 고정된 개념을 머릿속에 담지 않았다. 그것이 궁금하여 일곱 명의 디자이너에게 낭만을 묻고, 열 다섯 명의 아티스트에게 아름다움을 물었다. 아름다움과 낭만이라는 다소 난해한 주제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답변은 기능적이고 인간적이고 때로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것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또는 걸어간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으로 깨달은 아름다움이다. 먹고 소화하는 것,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이 사회의 각자에게 달렸다.

 

윤동주

에디터. 박선주

자료제공. 윤동주기념사업회, 민음사

참고자료. 「윤동주평전」(송우해, 푸른역사, 2004)

윤동주는 192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룡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아명 ‘해환’으로 불렸던 윤동주는 유복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명동촌의 민족의식과 기독교적 정신 속에서 성장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인 명동촌에서 산책을 즐겨하던 그는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이곳에서 보낸다. 명동소학교 시절에 대해, 당시 4학년 담임 선생이었던 한준명 목사는 “윤동주는 성품이 아주 순했어요. 너무 어질었지. 그래서 잘 울었고….”라고 회상한다. 이후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한다. 첫 번째 객지 생활이기도 했던 숭실 시절에 그의 시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동시에 평생을 두고 좋아하게 되는 정지용의 시를 접하면서 다소 현학적이었던 시가 쉬워지고, 동시를 짓기 시작한다.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며 광명중학에서 졸업을 하고, 1938년 평생의 지기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최현배 선생과 이영하 선생 등에게 우리말과 영시를 배웠으며 나중에 윤동주의 시들이 세상에 빛을 보는 데 크게 기여하는 정병욱과도 만나게 된다. 일제 치하에서도 비교적 학풍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연희전문에서의 시기는 윤동주의 시 세계가 다져지는 시기였다. 3학년 때 그는 거의 1년 동안 절필하는데, 시대 상황과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고 한다. <팔복> 같은 시가 이때 나왔다. 내적인 방황의 시간을 극복하고 1941년 졸업반 시절 <무서운 시간>, <거리에서>, <십자가> 등의 시를 집필한다. 그해 11월 윤동주는 그때까지의 시 중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는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경도의 도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긴다. 일본에서 윤동주가 쓴 시 중 남아 있는 것은 5편뿐이다. 향수가 느껴지는 <흐르는 거리>와 <사랑스런 추억>,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와 같은 구절이 나오는 <쉽게 씌어진 시> 등이다. 1943년 여름, 고향에 가기 위해 차표까지 사놓은 상황에서 7월 16일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으며 복강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복역 중인 1945년 2월 16일 순절하였다. 벗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시들과 정병욱이 갖고 있던 필사본 시집을 모아 1948년 그의 유고 시집이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1.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2. 일본 유학 첫 해 여름인 1942년 8월 4일. (앞줄 좌측부터, 윤영선, 송몽규, 김추형, 뒷줄 좌측부터, 윤길현, 윤동주.)

3. 도지사대학 시절,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

하하! 본래 재주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윤동주평전(송우해, 푸른역사, 2004)』에 실린 한준명 목사의

윤동주의 소학교 시절에 대한 회상 부분의 일부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별 헤는 밤> 中, 1941. 11. 5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 줄 아나

전차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광경, 정거장에서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때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중략)”

나에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

틈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종시(終始)> 中, 1939년(추정)

 

 

*작품의 텍스트는 모두 『정본 윤동주 전집』(윤동주 지음, 홍장학 엮음,

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를 생각한다. 피폐해졌을 때, 정신이 지방간이라도 된 느낌일 때, 윤동주를 읽는다. 우리는 어느 사람의 작품을 읽을 때, ‘ - 의 작품’을 생략하고 ‘누구’를 읽는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내게 있어 윤동주는 그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의 시를 대하면, 단어와 문장 이전에 인격과 존재를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도 물론 문장으로 집을 짓고 허물고 다시 짓는 수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치며, 언어의 청아한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그라는 사람과 생애와 언어를 따로따로는 생각할 수가 없어서,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곤 한다. 어떤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내게 보인 윤동주를 생각한다. 봉투에 한 줌의 눈을 옇고 글씨와 우표 없이 누나의 나라에 편지를 부치는 그를 생각하고,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는 우물 속의 추억 같은 사나이와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 소년을 생각한다.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한다. 참회의 글을 쓰고 주어진 길을 걸어간 그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비열하거나 비루한 것들로 뱃속이 빠듯해져 가는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순정(純正)함은 한 번도 글 속에 박제된 어떤 것이 아니어서, 내 속에서도 어떤 투명한 구석을 찾게 해준다는 것이 내가 시(그)에 대해 늘 놀라는 바이다.

 

 

 

 

 

 

 

완전한 기사는 <지콜론> 4월호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review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

Q & A

게시물이 없습니다

list 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