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낭만주의자의 사회-가우디라는 건축

g: Special Feature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i Cornet

 

에디터. 유인경

사진제공. 선우현승, 박선주

자료출처. Wikimedia Commons.

참고자료. 『가우디, 공간의 환상』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불리는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지중해 연안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 시에서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건축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가우디는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해 4년간의 예비 과정을 마친 뒤 1874년 시립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건축학교 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에 의하면 가우디는 많은 시험과 과제물 제출에서 한 번에 합격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가 과제물로 제출한 도면들은 여러 교수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결국 가우디는 8년 만에 전학과를 마칠 수 있었지만 졸업시험 성적은 최하위였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 로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편 가우디는 학생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바르셀로나 시에서 장인으로 인정받은 호세 폰트세레 메스트레스의 밑에서 일했는데 이곳에서 학업을 마칠 때까지 도제로 일하며 여러 가지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건축가이며 교수인 프란시스코 데파울라 델 빌랴르 이 로사노, 평판 높은 장인이며 건축가로서 19세기 절충양식의 대표자인 에밀리오 사라 코르테스 밑에서도 일했는데, 이는 비록 생활비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가우디가 졸업 전부터 건축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학교 공부와 제도공으로 바쁜 와중에도 가우디는 당시 유명한 주철, 목공, 유리공예의 전문가였던 에우달도 푼티의 작업장을 빈번하게 드나들며 건축에 필요한 예술적 요소들을 배웠으며, 바로 이곳에서 후에 그의 열광적 지지자이며 친구이자 후원자가 된 에우세비오 구엘을 만나게 된다.

가우디보다 여섯 살이 많은 구엘은 벽돌 제조업자로 뒤에 남작 작위까지 받은 성공적인 사업가였다.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1918년 구엘이 죽기 전까지 40년간 계속되었다. 1883년은 가우디가 건축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인정받은 해였다. 그해 주택 카사 비센스, 별장 엘 카프리쵸의 설계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의 총감독에 임명됐다. 카사 비센스와 엘 카프리쵸는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데하르 양식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부여했다. 1880년대 말에 지은 구엘 별장도 이에 포함된다. 흔히 평론가들은 가우디의 작품을 1890년대를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데, 가우디의 진가는 후반부에서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특히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가우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시기 가우디는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하나의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마치 자연과 흡사한 독특한 건축물들을 창조해냈다. 그중에서도 가우디 평생의 역작이라 불리는 건축물은 역시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이다. 가우디는 1883년 가을, 이 건물의 감독직을 수락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오로지 이 작업에만 몰두했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1926년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는 계속 건축되며 가우디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바로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자신의 위대한 작품 속에 잠들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1883~1926)

가우디 일생의 역작. 그는 교회 전체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조화되는 진실의 상징, 예술 작품이 되길 바랐다. 가우디는 이 교회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 교회 전체의 모형을 만들었고 교회의 모든 요소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설명해두었다. 현재까지 건축 중이다.

 

1. 2012년 현재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전경

2. 사그라다 파밀리아 천장 세부

 

예술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채이다. 진실이 없으면 예술은 있을 수 없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본질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은 생명이며 생명의 움직임으로 인간은 존재한다. 골격은 근육을 이용하여 우리 몸을 움직이는 지렛대이다. 예술적 표현은 골격에 해당한다. 그 밖의 것은 겉옷에 불과하다.

 

나는 꽃, 포도나무, 올리브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닭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곤충들의

날갯소리를 들으며 프라데스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스승인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상쾌한 이미지를 얻는다.

 

자유로운 사고는 자유가 아니라 진실의 노예이다. 자유는 사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욕에 속한다.

항상 열려 있으며 힘써 읽기에 적절한 위대한 책은 자연이다. 그 밖의 책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해석하고 음미하여 이러한 특성을 잃어버렸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 하나는 ‘도덕’과 ‘종교’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실에 의거해 우리를 인도하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이다.

 

현명한 사고는 과학보다 우수하다. Sapére 맛을 보다, 음미하다라는 이 단어에서 유래한 ‘현명한 사고’는 종합적이며 과학은 분석적이다. 분석에 의한 종합은 현명한 사고의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분석적인 것일 뿐 전체는 아니다. 현명한 사고는 종합적이며 생명력이 있다.

 

즉흥곡은 결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영감은 노력하지 않고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노력 끝에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매우 피곤하게 했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믿을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 않았다.

 

성과가 나타나는 유일한 길은 반복이다. 베토벤은 10년 전에 사용한 것을 다시 반복했다. 바흐 또한 그러했다. 카탈루냐의 시인 하신토 베르다게르는 자신의 시를 여러 번 고치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림은 색채, 조각은 형태로써 사람과 사물 등의 유기체를 표현한다. 외면적인 것을 통해서 그 내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건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기체를 창조한다. 그래서 자연의 모든 법칙과 조화의 법칙을 가져야 한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는 건축가는 예술 작품 대신에 졸작을 남기게 된다.

 

건축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연구와 인내의 반복 속에서 희생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매우 고차원적인 것이며 고통과 가난을 동반하는 가운데 균형을 잡는 추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균형을 잃고 만다.

 

나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슬프게도 내 손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위 내용은 가우디의 유일한 자서전 『가우디, 공간의 환상』(안토니 가우디 저, 이종석 역)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역자에 따르면, 이 글은 가우디의 청년시절(1876~1879) 자필 원고와 만년(1914~1926)에 남긴 말과 글들로, 만년에 남긴 말들은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건축에 전념하던 시기에 그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던 젊은 건축가들과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학교 학생들에게 주로 했던 것이고, 방문객들이 기록하여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카사 밀라(1906~1910)

돈 페드로 밀라 이 캄프스의 의뢰로 건축된 공동 주택. 매우 기묘한 모양의 지붕과 굴뚝, 환기탑, 옥상출입구로 유명하다. 가우디 건축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대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카사 바트료(1904~1906)

1904년에 작업한 돈 호세 바트료 카사노바스의 집. 1층과 2층의 건물 정면은 몬주익산 사암을 사용했다. 다른 부분은 일렁거리는 파도처럼 물결모양의 표면을 만들어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유리 파편과 둥근 채색 타일을 입혔다.

1. 카사 바트료 발코니

2. 카사 바트료 다락방 지붕

 

가우디라는 건축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만큼 경이롭고 예술적인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널리 이로운 일이라면 그 의미는 더 커질 것이다. 건축은 하나의 건물을 짓는 일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 사회를 형성하고 이는 곧 세계를 짓는 일이기에 경이로운 예술이다. 위대한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가우디는 모범(모범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유로운 정신과 신앙심을 더해 신성에 가까운 위대한 건축물들을 남긴 건축가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건축에 전념했기에 ‘건축의 성자’로 불리웠다는 가우디라는 한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조금 슬프기도 하다. 이토록 위대한 예술 작품을 하나씩 창조해낼 때마다 그는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가우디는 늘 건축가로서 희생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임했다고 한다.

가우디는 뛰어난 건축가이기 이전에도 인간적으로 충분히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 다. 건축은 물론, 실내디자인과 장식, 심지어 자신이 사용할 책상과 의자를 직접 디자인하는 멀티플레이어형 예술가였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신의 나라에 귀를 기울였던 그는 또한 노력파 천재였던 듯싶다. 학교 수업은 잘 듣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각종 도서를

섭렵했던 그는 부지런히 터득해 얻은 풍부하고 섬세한 지성에 의해 길러진 감정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스스로 일깨웠다.

그는 무엇보다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자연을 벗삼아 성장했던 그는 바로 그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건축물에 어떻게 자연이라는 요소를 조화롭게 활용해야 할지 잘 알았다. 그리하여 기존의 건축에 대한 답습이나 규칙을 통렬히 부수는 독창적인 건축물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자연의 이미지는 그 이전과 이후에도 볼 수 없던 것이다. 그는 이전에 직선으로 이루어졌던 건축물에 곡선이라는 자유를 불어넣었다. 누군가는 그의 건축물에 대해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예술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완전한 기사는 <지콜론> 4월호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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