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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곱지 않은 시선_검은 양

 

검은 양

연말 모임에서 만난 이웃집의 피터는 그래픽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드문 인물이었다. 프로그래머 출신 정보관리사로서 기업 임원직을 맡고 있는 피터는 내가 그래픽디자이너라고 소개하자 대뜸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시는군요” 하고 말해서 나를 놀래켰다. 자신과 같은 직종의 사람들은 데이터를 숫자로 기록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시각 정보로 표현하는 단계에서 그래픽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보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특수한 일을 그래픽디자인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림 잘 그리시겠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두세 수 위에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예술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가르친다고 하자 피터는 예술 분야에서 디자인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시니컬하게 예술가들은 디자인을 ‘검은 양’처럼 여긴다고 대답했다. 피터는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길 원했다. 난처했다. 이를 말하기 위해선 온갖 욕망과 의혹이 뽀얗게 쌓여 있는 그래픽디자인 교육계의 현실을 풀썩풀썩 들춰야만 할 것이다. 당연히 이웃집 송년 잔치에 어울리는 대화 소재는 아니다.

우리 학교 그래픽디자인과가 미술대학에 편성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미술대학 교수들은 그래픽디자인을 미술의 신개척지쯤으로 여겼다.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기업의 일을 맡아 윤택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 식민지. 당시 직업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장식 기술을 ‘실용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학과에 편성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회화과 교수들이 그런 기능을 가르치기란 어렵지 않았고,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찬밥 신세였던 미술대학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잃을 게 없는 장사였다. 더구나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썩 출중하지 않은 학생들(혹은 졸업하고 결혼해서 붓을 꺾을 여학생들)을 안정적 직장이라는 미끼로 꼬드겨 적당히 처치할 수 있는 구실이 되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미국의 미술대학 중에서 1970, 1980년대에 디자인학과를 개설한 후발 주자들의 머릿속 계산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처음 그래픽디자인 수업을 담당했던 교수는 애초에 회화과 교수로 임용된 분이셨다. 그분은 초기 컴퓨터 그래픽, 즉 당시 처음 등장했던 매킨토시 컴퓨터를 회화적으로 활용하는 가능성에 관심이 있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디자인 과목을 맡게 됐는데, 그 당시만 해도 그래픽디자인은 선택과목 중 하나로 비중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누가 담당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풍요와 낭만의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지독히 오른 기름값과 생활비, 교통문제, 환경문제와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부모들은 대학 진학을 앞둔 자식이 미술에 관심을 보인다 싶으면 가차 없이 그들을 ‘디자인과’로 밀어 넣는다. 미대에 속하면서 ‘취업’이 잘 된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예 술 사 회 의 비 예 술 적 예 술 가 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것은 미술대학에 속한 시각디자인과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양적 우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웃기게도 대학교 운영 차원에서 재학생의 숫자는 단과대학 및 학과의 권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종합대학교 내 소집단의 계급은 ① 외부 투자 유치 규모, ② 학생 수, ③ 정교수의 숫자를 기준으로 매겨진다. 미술대학이 유치하는 외부 투자금의 규모는 이공계 대학의 그것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고, 정교수의 숫자 역시 학교의 구색 맞추기에 필수적인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많은 경우 미술대학은 종합대학교 내에서 찬밥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미술이 소중하다는 사회적 인식은 고상한 척하는 자들의 입바른 소리일 뿐, 일단 실질적인 밥그릇 챙기기에 돌입하면 미술대학의 요구사항은 목록의 가장 아랫줄에 놓이는 게 현실이다. 미술대학이 대학 사회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학생 숫자를 늘려서 등록금 수입을 높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각디자인학과가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한다. 현대 정보화 산업사회의 인정을 받는(돈이 되고 취업이 되는) 학과를 꼽으라면 미술대학에서는 그나마 디자인과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미술대학은 대학의 이익 또는 권력 신장을 위해 ‘미래 산업’의 꿈에 부푼 신입생들을 과감히 받아들여 디자인학과의 크기를 최대한 부풀린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독립적으로 분리돼 있는 디자인대학도 다를 바 없다. 학생 수 늘리기는 당장의 살림 꾸리기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 보다 많은 등록금을 챙겨서 학교에 안겨 주면 미대의 권력이 신장되고, 늘어난 권력을 이용해 특권을 조금이라도 더 누릴 수 있다(예산, 새 건물, 신규교원 채용 등). 그러나 꼼수에는 부작용이 따르는 법. 모든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미술대학은 예술 사회다. 예술 사회는 아름다움의 표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이에 걸림돌이 되는 세속적 제약을 거부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사회의 의심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런 신성한 곳에 클라이언트의 비위를 맞추고 타협을 일삼으며 획일적인 이미지를 양산해 내는 디자이너라니! 누가 뭐래도 미술대학이라는 제국의 일인자는 서양화과가 되야 한다. 미술교육에서 가장 유래가 길고 미술사와 미학이라는 이론학이 확실히 뒷받침해 주는 정통 실기 분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서양화야말로 시각적 표현의 정수이자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주의자들의 굳건한 믿음에 감히 도전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정답이다. 회화과와 그래픽디자인과는 미술대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고, 나아가 두 학문 분야 사이에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대부분 허울 좋은 아첨이다. 특히 그 말을 한 사람이 전통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회화과 교수라면 더욱 그렇다.

 

한 대학원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죠” 그러자 그 심사관이 말했다. “인조적이고 얄팍하고 표면적이라는 뜻입니다.” 무뚝뚝한 말투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내가 물었다. “지금 디자인을 경멸하신 겁니까” 그러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네.”

—enneth FitzGerald, 『Volume』(Princeton Architecture Press, 2010), p. 144

 

무시를 당하건 조롱을 받건, 나만 모른 척하고 지내면 마음은 편하다. 그러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덮어 둔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다. 디자인을 바라보는 미대 사회의 시선은 좋게 말하면 좀 덜떨어진 아류, 나쁘게 말하면 필요악이다.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일부로 인정하지만 몇 단계 아래에 있는 천한 녀석, ‘검은 양’이다. 시각디자인학과가 미대에 얹혀살면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디자인이 수준 낮은 기능직이기 때문일까? 검은 양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흑염소였다면? 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자존심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자인학과가 미대에 소속됨으로써 생긴 태생적 한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걸 음 마

시각디자인 분야는 지금까지 미술대학의 일부로 인식돼 왔다. 심지어 요즘 늘어난 독립된 디자인대학도 쉽게 미술대학으로 분류된다. 사회 전반의 인식은 ‘디자인 ∈ 미술’이라는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간단히 말해 이 사회에서 디자인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미술 이상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디자인과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디자인의 격차가 심하다. 이러한 어긋남을 시사하는 단편적 현상으로 디자인은 좋은데 쉽게 부서진다든지, 디자인 때문에 통행이 불편해졌다는 식의 불평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쉽게 부서지거나 불편한 것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디자이너의 고민거리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디자인이 미술의 세부 갈래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디자이너가 자신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적 편견에 굴복한 디자인 교육은 산업 활동을 치장하는 데 적합한 회화적 기능 숙달에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교육을 받은 인력이 사회로 진출해 기존의 잘못된 인식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한다. 악순환이다. 미술대학의 성 안에 사는 디자인은 자신만의 성을 쌓지 못한다. 미술의 일족으로서 가계의 번영에 보탬이 되면 그만이다. 그래픽디자인은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중이다. 이 분야의 활동을 사회가 처음 인식하고 겨우 100여 년이 지났을 뿐이고, 그래픽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생긴 지는 9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의 디자인의 학문적 체계는 철저히 예술에 종속된 활동이라는 관점에 따라 써졌기 때문에, 그래픽디자인을 시각문화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루려는 시도는 1950년대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어떤 깊이 있는 담론이 생기기는 무리다. 그리고 이렇듯 미숙한 분야를 급속히 수면 위로 떠올린 배후 세력이 산업자본이라는 사실도 그래픽디자인이 시각문화를 연구하는 탄탄한 학문 분야로 자리 잡기에 적합한 배경이 못 된다.

그래픽디자인학, 또는 시각디자인학에 깊이 있는 이론과 풍부한 역사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야의 독립된 지성이 깨어나 지적 담론을 펼치기 시작한 지 6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때에 확고히 정립된 연구 기반이 갖춰져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제 겨우 다양한 논의가 오가기 시작한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록 논문, 저널, 이론서와 같은 체계적인 연구보다는 단편적인 의견 제시(지금 이 글의 내용과 같은)에 머무르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 10년처럼 그래픽디자인 사회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던 적이 없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으려면 그래픽디자인에 특화된 역사가와 이론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외부 지식인들의 역량이 흘러들어 와야 한다. 그러나 그래픽디자인이 회화적 표현의 세부 갈래로 위치가 정해진 미술대학에서 이러한 비전은 쓸데없는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미술대학에는 미술사가 있고 미학이 있고 미술교육이 있다. 미술사가는 그래픽디자인을 20세기 미술에 발생한 어떤 현상으로 규정하고, 이 현상을 회화적 관점과 방법론에 따라 해석하고 기술한다. 지금껏 그래픽디자인의 역사는 철저히 미술사에 의존해 써졌다. 한 시대의 시각 문화란 익명의 집단 저자가 만든 대중문화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분야가 보유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역사서가 모두 전형적인 백인 남성 영웅들과 특정 순간들을 나열하는 서술 방식을 취한 것은 미술사에서 그 출발점을 찾은 탓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래픽디자인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높은 교육 수준과 엄청난 양의 연구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 노력과 투자에 비해 상업성은 보잘것없는 전형적인 리서치 활동이다. 한국처럼 디자인 이론 서적에 대한 수요가 적고 한글로 쓰인 책은 한국 사람밖에 읽지 못하는 불리한 상황에서 그래픽디자인 역사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는 대학이 유일하다. 대학은 정년제도를 통해 교수가 긴 호흡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디자인대학이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과를 세우고 그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교수단을 구성한다면 그들은 올바른 환경에서 중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대학 내부에 그래픽디자인 역사 또는 이론을 심화 연구하는 학과를 신설하자는 제안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수업은 어디서나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시간강사 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그들의 연구를 충분히 지원할 수 없다. 그래픽디자인과가 미술대학에 속함으로써 스스로를 제한하는 풍토가 변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이 확실치 않은 연구 주제에 뛰어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밖 으 로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는 없다는 말에는 미묘한 함정이 있다. 이 말을 입에 담는 우리는 은연중에 역사적 이론적 기반이 약한 우리 분야를 못마땅해하며 위풍당당한 예술의 왕국에 귀화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예술과 디자인, 회화와 그래픽디자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연구는 예술사, 디자인사에 얽힌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런 개념적 가치를 실제 작업의 영역에 끌어들임으로써 디자인을 고귀한 작품 활동으로 격상시키려는 시도는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괜히 “나도 예술이야”를 외치며 갤러리 안방 문턱을 기웃거릴 게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예술이 어떤 식으로 대문 밖 사회 다른 분야와 긴밀한 관계를 이룰지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해야 할 때이다.

먼저 디자인학과 또는 디자인대학의 연구 활동은 ‘미술대학’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이 글 처음에 소개한 피터만 해도 그렇다. 정보관리사인 이웃집 남자는 좋은 그래픽디자이너의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반면 내가 일하는 미술대학의 교수들, 회화과, 조소과, 사진과 교수들은 디자이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껏 바란다면 자신들의 전시회 도록과 웹사이트를 만들어 주는 정도. 눈을 조금만 밖으로 돌리면 디자이너의 손길이 절실한 학술적 연구가 널려 있다. 그러한 사항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분야의 전공자들조차 그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문과대학을 들 수 있다. 문학과 타이포그래피는 숙명적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지금껏 현대 대학 교육은 이 관계를 철저히 간과해 왔다. 1900년대 초 무렵, 유럽에서 미래주의와 구성주의가 붐을 타던 시절, 그리고 그 훨씬 이전부터 시를 짓는 일과 활자를 운용하는 일은 하나의 통일된 영역이었다. 시인이 활자를 부리거나, 화가가 시를 짓는 활동이 일반적이었다. 굳이 구상시까지 가지 않더라도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직접 구상하고 제작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영역은 점차 분리되어 지금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타이포그래퍼의 역할을 소화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세분화된 전공에 얽매인 우리는 지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 활동의 원형에 비춰 우리는 가능한 연구 두 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래픽디자인학과 학생과 어문학과 학생들이 각각 50퍼센트의 비율로 구성된 수업을 개설하는 것이다. 이커리큘럼은 양쪽 분야의 학생들을 짝지어 작은 출판물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는 형식이 된다. 다른 하나는 문과대학교 학생이 들어야 하는 타이포그래피 수업, 미대 학생이 들어야 하는 문학 수업을 개설하는 것이다. 이 과목은 단순히 교양과목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양쪽 학생들 모두 상당한 심화 단계까지 연구하는 필수 이수 과정이 돼야 하며, 필요하다면 두 학기 이상 연속되는 커리큘럼으로 계획해도 좋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학 역시 그래픽디자인과의 학계적 연결이 필요한 분야 중 하나다.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시각 커뮤니케이션이 막대한 부분을 차지함에도 그래픽디자인에 대한 연구는 피상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 밖에도 소프트웨어 공학(그래픽 인터페이스), 사회학, 인류학(기호와 상징에 관련한 시각 문화), 교육학 전반(텍스트, 시각 교재), 언론정보학, 문헌정보학, 통계학(시각적 정보 구성), 재료과학(친환경 디자인)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그래픽디자인과의 협업이 필요하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꼽아도 이 정도다. 세부 사항까지 깊이 들여다본다면 훨씬 더 많은 분야가 그래픽디자인과 직간접적 영향을 맺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다자 간 연합 연구는 지금 착수해서 조금씩 실현해 나갈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구조는 디자인대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되, 모든 디자인 전공 학생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연계된 타 학과에 상주하는 형태다. 디자인대학은 교수 연구실, 사무실, 최소한의 교실 정도만 유지하고, 학생들의 실질적인 상주 공간인 스튜디오를 타 학과에 분산 배치한다. 단순히 물리적 위치만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학과 수업의 일부를 의무적으로 이수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동기와 발상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교수의 지도하에 학생 스스로가 프로젝트를 개발·진행하는 식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협력 학과 전공자와의 협업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렇게 하려면 안 그래도 모자란 4년이라는 시간을 채우는 많은 디자인과 필수과목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기능 숙련 위주의 커리큘럼을 몽땅 배제하고, 그래픽디자인 전공의 핵심이 되는 최소한의 과목만 남긴 상태에서 나머지 시간을 모두 세미나 시간으로 운용한다면 시간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런 학제를 현실화하려면 오만 가지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일단 학과의 힘이 분산될 위험이 있는 이런 계획을 디자인과가 선뜻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고, 자기 학생들 챙기기도 버거운 타 대학 및 학과들이 동조하기 힘든 발상이기도 하다. 그 외 돌덩어리 같은 행정 절차, 이리저리 꼬인 정치적 문제 등은 예상조차 불가능하다. 실현이 된다면 그것은 미래의 신생 학교, 혹은 디자인과를 신설하는 학교에서일 것이다. 요점은 대학에서 이뤄지는 디자인 연구가 미술대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최대한 타 분야로 향해야 한다는 믿음을 어떤 식으로든 실행하자는 것이다. 디자인 연구가 고유의 특성을 갖추고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한 채 미술대학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회화도 기능직도 비즈니스도 아닌 애매한 직종이 되어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동시대의 상황에 부합하는 디자인 연구 방향은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다른 학문 분야와의 접점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 속에서 디자인의 모습과 역할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 협소한 예술가의 사회가 아닌 드넓은 인간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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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디자이너 이지원의 더 많은 이야기는 "디자이너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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