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집을 짓다_멈추어

그곳에 집을 짓다



글, 그림 홍시야



멈추어


여기 따뜻한 차 한잔
세상의 모든 부재와 상실
달빛 아래 비밀스러운 생각들
한가운데 세운다
아무렴
그래도 참 좋았다고
춤추다, 그 섬
먼 길을 돌아왔으니 나는 이곳에 서 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빈집
강 건너 그 집
돌아가십시오
답이 없는 곳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에
흐린 듯
비가 — 우리 집, 슬픔을 위로하다
같아도 다른 해와 쉼
저기 이상한 나라에서는
다만 홀로 서 있을 뿐
고요만 남아
다시 시작하면 될까
이곳으로 긴 여로




여기 따뜻한 차 한잔
오늘이라는 그릇에 한숨을 담고, 비운다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모두 각자 자신의 그릇으로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부재와 상실
사라지는 것들의 방식은 모두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라지면 출발인 것이다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나는 서운해하지 않겠다
곧 봄이 올 테니까





달빛 아래 비밀스러운 생각들





흐린 듯
오늘은 명상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몸이 아팠다. 아파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애써 꽉꽉 눌러놓고 보기 싫었던 상처들이 올라올까 봐 두렵고 무서워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머리로는 이미 끝난 문제라고 생각하고 덮어 두었던 일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하나씩 하나씩 그 문제들과 마주해야 했다. 내가 그저 피할 수 있을 상처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머리로만 치유된 상처는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비가 — 우리 집, 슬픔을 위로하다
2013년 11월 12일, 그곳에 집을 지었다
텀벙 마음이 내려앉아 첫 집을 짓던 그날,
내 마음이 콩닥콩닥 울렁거렸다
왠지 모를 설렘으로 나는 고속 열차를 탔고
어딘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었다





다시 시작하면 될까
마음수행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절실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다스릴 여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명상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냉큼 문경 한산사로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새벽 5시 30분을 시작으로 밤 9시 30분까지 식사를 하는 시간 외엔 선방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반가부좌를 틀며

명상을 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본격적인 명상수행에 앞서, ‘낯선 이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기억하고 싶지 않아 꾹꾹 억눌렀던 감정들이 갑자기 올라오면 어쩌지?’하는 때늦은 후회와,

낯선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불안감으로 잡념에 휩싸여 있었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음공부의 깊이에 빠져들 수 있었지만 말이다. 꼭꼭 닫혀 있던 마음의 문도 조금씩 무장해제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마 나는 눈이 내리는 겨울, 한산사를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눈 덮인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곳에서 만날 인연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오는 겨울 그 집에 모여있을 사람들 생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벅차다.


#1.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나를 보았다. 창피스럽기도 하고 감추고 싶었던 내 기억들이 세포마다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었다.

그동안 원망으로 가득 차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아버지와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이제는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한산사로부터의 이 끌림은

아무래도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하게 떠난 내 아빠와 화해를 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빠에 대한 원망이 곧 사랑이었고, 그리움 때문에 몸부림쳤던 것임을 알아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내 몸 안에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며칠 내내 왼쪽 눈에서만 흐르던

눈물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했다. 아빠를 마주하고 나서야 양쪽 눈을 통해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었다.

이 화해로 며칠간 잃었던 내 오른쪽 눈이 자연스레 다시 돌아왔다. 


#2. 술 없음, 야식 없음, 커피 없음, 고기 없음, 낯선 이들과의 동침. 이것만으로도 내겐 큰 도전이자 고행의 길임이 분명하다.  


#3. 이 집에 앉아 명상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에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항상 나는 어딘가 모를 공허함을 갖고 살아왔고,

마음이 텅 비어져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며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 안의 소우주를 만났다.

지금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고 나를 관찰해 나갈 것이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오던 부담감, 불안함.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서의 강박감과 긴장감.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의 문제를 내가 다 해결해 줘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온 압박감. 나는 나의 일과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감정들이 이번 생에 내게 주어진 수행임을 알았다.

그 마음 수행은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이 모든 것들을 의연하게 마주하겠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저자 소개


홍시야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미술작가.
하얀 도화지 위에 당신을 위한 집을 그린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행복해지기 위해, 이번에 주어진 인생길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오늘도 지구라는 별을 유랑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공동 작업을 하며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저서로는 『혼자살기』, 『서른의 안녕한 여름』, 『오늘, 행복하기』가 있다.
hongsiya.com @hongs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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